판 뒤엎은 트럼프… 판 붙드는 김정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열린 금융규제 완화 법안 서명식에서 북·미 정상회담 취소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 강원도 지역에 완공된 고암∼답촌 철길을 살피는 모습. 김 위원장의 방문 시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취소 발언이 나오기 전으로 추정된다. AP뉴시스


美, 전격적인 벼랑 끝 카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 뒤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건설적인 대화와 행동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회담 재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존 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수도 있고, 다른 날에 열릴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열린 금융규제완화 법안 서명식에서 “정상회담 취소는 중대한 차질”이라면서 “북한의 미래와 관련해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서 이같이 언급했다.

이처럼 대화 의지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전격 취소한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라는 게 백악관의 설명이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지난주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싱가포르에 파견했는데, 북한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전화도 안 받았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그런 행동이 상식 이하라며 북한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비핵화 방식과 관련해 ‘리비아 모델’을 거론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난하는 성명을 낸 직후만 해도 ‘트럼프식 모델’을 얘기하면서 북한을 달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또다시 미 행정부 넘버 2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자 북한의 태도가 대화 상대국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런 배경에 진지한 협상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한의 태도 변화에 중국 배후론을 거론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도 회담 취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두 차례 방중을 통해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으면서 굳이 미국의 체제안전 보장과 경제 지원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회담을 해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이 느닷없이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걸고넘어지면서 비난 성명을 잇따라 내놓은 것도 중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신경전 이전에 이미 회담이 제때 열리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정상회담이 3주 남은 상태에서 합의문 초안조차 만들어지지 않을 만큼 협상이 더디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비핵화 이행 시기가 핵심 쟁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도 오락가락했다. 그는 지난 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한꺼번에 이행돼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 다음 날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단계적인 이행도 가능하다”고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본인부터 북한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입장 정리가 안 된 상태였고, 그런 만큼 회담 개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또 북·미 간 협상에서 양측의 최우선순위가 달랐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빚어졌다고 분석했다.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은 “북한에 미국이 보장한 ‘잘사는 것’은 부차적인 고려사항이며 그들에겐 체제안전이 최우선”이라고 NYT에 말했다. 북한의 최대 관심사는 체제안전 보장인데 미국이 지나치게 경제적 접근만 했다는 지적이다.

회담이 취소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대북 압박 정책도 다시 거세질 전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정부가 다음 주 중 수십 가지의 새로운 대북 경제제재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北, 깜짝 놀라 유화 제스처

미국을 향해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을 펴던 북한이 25일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자세를 한껏 낮췄다.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한이 공개된 지 8시간여 만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 담화를 내 대화 의지를 확인했다. 북한으로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 직후 정상회담 취소 통보로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지만 미국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북한이 180도 태도를 바꿔 사태 수습에 나서면서 북·미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도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김 제1부상은 담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회담 취소를 발표한 것은 우리로서는 뜻밖의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우리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며 “우리는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매체들은 이 담화가 ‘위임에 따라’ 발표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라는 의미다.

김 제1부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용단을 치켜세우며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했다. 그는 “만나서 첫술에 배 부를 리 없겠지만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느냐”고 말했다. 또 “트럼프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요구 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길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트럼프 방식은 북·미 사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백악관이 리비아식 해법에 선을 그으며 내놓은 북한 맞춤형 대안이다.

김 제1부상은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도 직접 해명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한 ‘커다란 분노와 노골적인 적대감’은 사실 일방적인 핵 폐기를 압박해온 미국 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직속 부하의 담화 의미를 하루 만에 스스로 축소한 것이다. 최 부상은 24일 담화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을 ‘아둔한 얼뜨기’라고 조롱하며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날지,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날지는 그들의 처신에 달렸다”고 했었다.

당초 북·미 정상회담 재검토 가능성을 먼저 언급한 쪽은 북한이었다. 김 제1부상은 지난 16일 담화에서 리비아식 해법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대미 강경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를 기점으로 북한의 대미 비난 수위가 점점 높아지다 최 부상의 ‘핵 대 핵 대결’ 담화로 정점을 찍었다. 이에 맞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를 공식화하자 공수가 바뀐 셈이다.

북한은 당분간 대미 저자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모두 대화의 끈은 놓지 않고 있어 양측 간 실무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재개를 논의할 여지가 있다.

현재로선 북·미 정상회담이 다시 열리더라도 날짜는 조정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에서 ‘12일 싱가포르 회담’을 콕 찍어 적절하지 않다고 밝힌 이상 변동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앞으로 북·미 간 협의가 어떻게 재개되고 진행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은 아무것도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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