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 불씨 살아났다] 유화 제스처로 판 붙든 김정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 강원도 지역에 완공된 고암∼답촌 철길을 살피는 모습. 김 위원장의 방문 시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취소 발언이 나오기 전으로 추정된다. AP뉴시스


미국을 향해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을 펴던 북한이 25일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자세를 한껏 낮췄다.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한이 공개된 지 8시간여 만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 담화를 내 대화 의지를 확인했다. 북한으로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 직후 정상회담 취소 통보로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지만 미국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북한이 180도 태도를 바꿔 사태 수습에 나서면서 북·미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도 김 제1부상 담화를 긍정 평가하면서 대화의 문을 열어뒀다.

김 제1부상은 담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회담 취소를 발표한 것은 우리로서는 뜻밖의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우리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며 “우리는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매체들은 이 담화가 ‘위임에 따라’ 발표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라는 의미다.

김 제1부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용단을 치켜세우며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했다. 그는 “만나서 첫술에 배부를 리 없겠지만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느냐”고 말했다. 또 “트럼프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요구 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길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트럼프 방식은 북·미 사전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백악관이 리비아식 해법에 선을 그으며 내놓은 북한 맞춤형 대안이다.

김 제1부상은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도 직접 해명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한 ‘커다란 분노와 노골적인 적대감’은 사실 일방적인 핵 폐기를 압박해온 미국 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직속 부하의 담화 의미를 하루 만에 스스로 축소한 것이다. 최 부상은 24일 담화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을 ‘아둔한 얼뜨기’라고 조롱하며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날지,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날지는 그들의 처신에 달렸다”고 했었다.

당초 북·미 정상회담 재검토 가능성을 먼저 꺼낸 쪽은 북한이었다. 김 제1부상은 지난 16일 담화에서 리비아식 해법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대미 강경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를 기점으로 북한의 대미 비난 수위가 점점 높아지다 최 부상의 ‘핵 대 핵 대결’ 담화로 정점을 찍었다. 이에 맞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를 공식화하자 공수가 바뀐 셈이다.

북한은 당분간 대미 저자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정상 모두 대화 의지를 내비치고 있어 양측 간 실무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재개 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선 북·미 정상회담이 다음 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예정대로 열릴지, 날짜가 변경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 관계자는 “앞으로 북·미 간 협의가 어떻게 재개되고 진행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은 아무것도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