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16일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공식 사과를 표명했다. 이 사과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정부의 문화정책 구상인 ‘새 예술정책과 문화비전 2030’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뤄졌다. 사과의 주체인 도종환 장관은 본인이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 피해자이기도 했으며 장관이 되기 전부터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를 대표한 그의 사과는 아이러니했지만 이어진 미래 지향적 정책 발표로 관심이 옮겨진 탓에 현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의 첫 공식 사과라는 점에서 언론들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뒤이은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 기관들의 사과 발표 현장은 온도도, 분위기도 문체부의 사과 발표와 사뭇 달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립극단, 예술인복지재단 등이 별도로 사과 발표를 했지만 문체부 때와 달리 피해 예술가들의 분노와 항의는 격렬했다. 문예위의 경우 사무처장이 자진 사퇴를 표명했지만 예술가들은 이에 반발하며 징계를 요구했다.
예술가들이 자신들과 접촉하고 활동하며 신분이 노출된 산하기관 책임자들에게 더욱 직접적인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상위 권력인 문체부 공무원들은 특별검사팀의 블랙리스트 수사 이후 장차관 외에 10명이 채 안 되는 과장급 이상이 감봉 등의 경징계를 받은 것이 전부다. 낮은 수위의 징계에 대해 문체부는 ‘윗선에서 시키는 것을 이행했을 뿐’이라고 해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하기관의 책임자와 실무자들은 문체부 내 말단 공무원의 지시조차 거부할 수 없는 하위 권력자들이다. 그들의 신분이 노출되고 징계와 처벌을 요구받으며 직업적·정치적 위기를 겪는 동안 상위 권력인 문체부 공무원 실무자들의 이름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채 여전히 조직의 우산 아래 보호받고 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다. 산하기관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징계가 부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처벌이 필요하다면 더 큰 권력을 가지고 블랙리스트를 작동시키고 실행을 강요한 문체부에 대해서 더욱 혹독해야 공평하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문화예술계에 정부의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며 빚어졌다. ‘새 예술정책과 문화비전 2030’에 참여했던 민간 태스크포스(TF) 위원들은 이 문제를 의식하고 정부의 권력 집중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그중에는 문체부 기능 축소와 일부 부서 폐지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장관의 사과와 더불어 발표된 새 예술정책 발표 안에는 문체부 자체 개혁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채 문화예술위원회를 비롯한 산하기관의 혁신 내용만으로 채워져 민간 위원들을 낙담하게 만들었다. 마치 블랙리스트 사태의 책임 소재를 산하기관의 부실함으로 돌리는 모양새다. 블랙리스트의 피해자이기도 한 장관과 현란한 미래의 청사진을 방패 삼아 이 순간만 모면하고 다시 구태의연한 예술 간섭의 행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은 문체부라는 ‘시스템’이 이처럼 변할 생각 없이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민관 TF팀인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공무원을 포함한 블랙리스트 범죄에 참여했던 관여자들에 대한 책임 규명 권고안(처벌 권고)을 곧 발표할 예정이다. 그들의 발표가 ‘권고’로만 그치며 열과 성의를 다해 참여했던 민간 위원들과 피해 예술가들을 좌절시키지 않기를 부디 바란다.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