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의 대표적 ‘유머리스트’로 평가 받아 온 소설가 이기호의 신작 소설집. 특유의 웃음기를 조금 걷어내고 우리가 왜 유머를 잃은 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왜 고통을 당하고도 수치를 느끼며 살아가는지 묻는다.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한정희와 나’를 비롯해 소설 7편이 묶였다.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소설가인 ‘나’는 어느 날 한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나의 장편소설이 염가에 올라온 것을 발견한다. 판매자는 ‘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4000원-다섯 권 구매 시 무료 증정)’이라고 책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병맛’이란 평에 허탈해하고 ‘무료 증정’이란 판매 조건에 열 받는다.
‘나’는 판매자를 대면하기 위해 직거래를 제안하고 이 남자를 만난다. ‘나’는 그에게 왜 내 책만 무료 증정인지 묻는다. 판매자는 ‘나’가 문제의 소설을 쓴 작가라는 걸 알아채고 미안해한다. 헤어질 무렵 ‘나’는 그 책에 적힌 서명 ‘최미진님께. 좋은 인연’을 떠올리곤 판매자에게 묻는다. “최미진은 누구냐”고. 그는 답 없이 사라진다.
몇 시간 뒤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건다. “아저씨는 우리 미진이 잘 모르면서 그냥 좋은 인연이라고 쓴 거잖아요.” 본래 그 책의 주인은 그를 떠난 연인이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준’ 나의 행동을 부끄러워한다. 작가는 이렇게 부끄러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다. 용산 참사를 취재하는 소설가가 현장에 출동하지 못한 크레인 기사를 만나고(‘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봄’), 아파트 단지 앞에서 돈을 돌려달라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불편해 주민들은 돈을 모아준다(‘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런 구차한 삶 속에서 과연 우리는 타인에게 완전한 환대를 베풀 수 있을까. 모든 여성에게 두루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후일 그 친절의 기억을 잊어버리고(‘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아내를 키워준 이의 혈육 ‘한정희’를 기쁘게 맞지만 그 아이의 뻔뻔함과 말썽을 견디지 못한다(‘한정희와 나’).
이기호는 작가의 말에서 “책이나 소설로 윤리를 배울 수 있나. 책이나 소설로 부끄러움을 배울 수 있나.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불가능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우리 주위 사람들이 받는 무수한 고통에 대해 그가 도달한 결론인 듯하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