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도 中도 美도 그로 통한다… 잘나가는 김영철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맨 왼쪽)이 30일 중국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도착해 수행원들과 함께 공항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 부위원장은 지난 29일 미국 워싱턴행 항공편을 예약했다가 30일 뉴욕행으로 바꾸는 등 항공 스케줄을 수차례 바꾼 끝에 이날 뉴욕으로 출발했다. 그의 뒤는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다. AP뉴시스


목적 위해 수단 안가리는 성격… 김일성군사종합대 나온 엘리트
남북 회담 무대 30년 베테랑 和戰 모두 능한 ‘두 얼굴’ 가져
정찰총국장·통전부장 능력 인정 김정은 집권 직후부터 직보 위치
대남·대미 전문 인물난도 한몫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활약상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김영철은 대남총책으로서 올해 초 한반도 해빙 국면에서 남북 정상 간 메신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이어 북·미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미국을 전격 방문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최종 담판에 나섰다. 2000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특사 자격으로 방미해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도출한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과 비견할 만한 무게감이다.

북한 전문가와 대북 협상가들은 김영철이 승승장구하는 배경으로 다채로운 이력을 꼽는다. 김영철은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나온 군부 엘리트다. 동시에 남북 회담 무대에서 30년 가까이 활약한 베테랑 대남 협상가이기도 하다. 김영철이 ‘스파이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북한군 정찰총국장을 거쳐 대남정책 총괄자인 통일전선부장에 오른 것도 이런 다재다능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화전(和戰) 양쪽에 모두 능한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평가도 있다.

대북 소식통은 30일 “김영철이 부각되는 것은 그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뜻을 가장 잘 받들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라며 “김영철은 김 위원장의 입장을 직접 대변할 만한 지위와 책임을 갖고 있다. 김영철의 메시지는 곧 김 위원장 뜻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김영철은 1989년 남북 고위당국자 회담 예비접촉 북측 대표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 전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김영철과 회담장에서 자웅을 겨뤘던 우리 측 전·현직 협상가도 꽤 많은 편이다. 그와 회담에서 대면한 적이 있는 전직 정부 관계자는 “머리가 명석하고 달변이었다. 외모도 썩 괜찮은 이미지였다”면서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 같았다. 사정도, 구걸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협상 태도를 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날카롭고 거만하고 아랫사람에게는 힘을 주면서도 윗사람에게는 아부를 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전직 군 관계자는 “말을 하다가도 입을 꾹 닫고, 얼굴을 붉히며 치받다가도 웃는데 그 변화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전략적인 협상가라고 할 수 있다”며 “상대방에게 훈시를 하는가 하면 친절하게 가르치고 다독이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싶으면 화도 낸다”고 말했다.

김영철은 북한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한 전문가로도 평가된다. 김정은정권 출범 이후에는 김 위원장에게 직접 보고가 가능할 정도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철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전 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김영철은 북한 당국에서 남한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인사일 것”이라며 “그는 남한 정치지형 변화와 여론 흐름, 역사적 발전 과정, 남한 사회의 장단점 등을 북한 내에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미·대남 엘리트가 많이 사라진 것도 김영철이 주목을 받는 또 다른 배경이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대남총책은 김용순·김양건 대남담당 비서처럼 노동당 국제부나 외무성에서 경험을 쌓은 외교관 출신이었다. 하지만 2015년 12월 김양건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진 이후 김영철에 비견할 만한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미외교 분야에서도 강석주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2016년 5월 식도암으로 숨졌고,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도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성은 이상헌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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