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흙바닥이 훤히 드러난 언덕에 기이한 형태의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가지가 축 처진 걸 보니 죽어가는 나무인 듯하다. 화면 뒤쪽으론 나지막한 잡목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았다. 분명 을씨년스러운 야산 풍경인데 녹색과 적색, 황토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지며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단순화된 나무의 선들은 수직 수평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며 화폭에 운동감과 함께 초현실적 기운을 드리운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을 독특하게 표현한 작가는 류경채(1920∼95) 화백이다.
류경채는 1949년 왕십리 야산을 그린 이 작품으로 광복 후 처음 생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당시만 해도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대세였으나 류경채는 주관적 시각으로 자연을 해석해 파란을 일으켰다. 70년 전에 이토록 세련되게 표현주의적 회화를 시도했던 화가는 이후 추상의 단계로 과감히 접어들며 한국 현대미술에 큰 분수령을 이뤘다.
미국 화단에 자연물의 원형을 조합해 내적 세계를 드러낸 아실 고키가 있었다면 한국엔 류경채가 있었다. 이 그림은 아실 고키의 ‘내면적 풍경’에 필적할 만한, 아니 그를 뛰어넘는 우리 근대미술사의 걸작이다.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본질을 담아낸 류경채의 그림에는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녹아들어 있다. 척박한 대지에 앙상한 고목과 잡목이 뒤엉켜 있지만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겨레의 질긴 생명력도 감지된다.
류경채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꾸민 ‘내가 사랑한 미술관’(∼10월 14일)에 포함됐다. 덕수궁에서 계절을 만끽하며 우리 근대미술의 걸작들을 음미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