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유명한 황선미(55) 작가의 신작 소설. ‘엑시트(EXIT)’는 황 작가가 오래전 ‘입양’이란 말을 우연히 들은 날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취재에서 집필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긴 창작의 산고 끝에 태어난 주인공은 생의 밑바닥에 놓인 열여덟 살의 미혼모 ‘노장미’다.
“사랑해. …난생처음 들었던 그 말은 더러운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린 빗물 같았다. 아프고 구차하고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거였다.” 장미는 그저 J가 좋아서 고백을 했을 뿐인데 J는 장미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억지로 가진 뒤 “사랑해”라고 한다. 장미는 한순간 벼랑 끝에 선다. 아이를 가지게 됐고 학교를 나와야 했고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보호시설에 몸을 맡겼지만 아기를 입양 보내긴 싫었다. 아기를 데리고 도망쳐 나와 시설에서 만난 ‘진주’의 반지하 방에 얹혀살게 된다. 장미는 분유와 기저귀 값을 벌기 위해 한 사진관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작가는 장미가 만난 가시 돋친 삶의 장면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분유를 사기 위해 실장에게 “3만원만 가불해 달라”고 하고, 지하철 요금이 없어 역 주변을 한없이 걷고, 핸드폰을 충전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갔다 쫓겨난다. 입양을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하필 이 사진관은 입양될 아기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곳.
어쩔 수 없이 장미는 말투도 외모도 낯선 해외 입양인들과 마주치게 된다. 폭우가 쏟아진 날, 반지하 집이 물에 잠긴 틈을 타 진주는 아기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미혼모와 입양이 주제라면 뻔한 전개가 예상되지만 이렇게 장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은 너무 긴박해서 잠시라도 책을 내려놓기 어렵다.
아기도, 갈 곳도 없는 장미는 건물 청소부 아줌마의 호의로 계단 밑 휴게 공간에 몸을 누인다. 장미는 이처럼 예기치 않게 청소부에게 여러 차례 신세를 진다. 청소부는 장미가 절박한 순간에 처했을 때 “거기, 안에. 너 괜찮니?”라고 묻는다. 장미가 죄책감에 떨며 “내가 나빠서 미안하다”고 했을 땐 “넌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야”라고 말해준다.
장미를 외면하지 못하는 청소부 덕분에, 자기를 버린 나라를 다시 찾아온 입양인들 때문에 장미는 자기 삶에도 출구가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작가는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처럼 버려진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구출하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양계장을 탈출한 잎싹 대신 아픔으로 점철된 삶에 갇힌 어린 소녀 장미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