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노(老)신학자 얼굴엔 만감이 교차해 있었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오락가락했던 일련의 상황들에 마음이 복잡했던 거다. 주변에선 이제 그만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교육학 박사로 수많은 목회자와 학자, 교사를 키워낸 주선애(95)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 이야기다. 지난달 존경받는 스승으로 ‘숭실기독인 비전선포대회’에 참석하는 등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살고 있다.
최근 서울 강동구 명일로의 자택에서 주 명예교수를 만났다. 병원 방문이나 모임·행사 참석할 때를 빼곤 대부분의 시간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전국여교역자연합회 복지재단 안식관에서 지낸다. 은퇴 여교역자들이 함께 지내는 공간이다. 주 명예교수가 땅을 헌납해 안식관을 세울 수 있었다.
“6층 볕이 잘 드는 곳에 제 방이 있어요. 새벽기도 마치면 중보기도 하고 주변 산책을 합니다. 식당에서 여교역자들과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상담도 합니다. 책도 열심히 읽고 있어요. 전혀 무료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주 명예교수는 1924년 평양의 한 독실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터라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여성이라도 기술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먹고살 수 있다는 어머니 말에 산파공부를 했고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러나 공산당을 피해 48년 월남하면서 산파 자격증을 ‘변소통’에 버렸다.
“38선을 넘을 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하나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산파 일로 돈을 벌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그 약속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겁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 가난한 산모들을 도운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그 일로 돈을 벌어본 적 없습니다.”
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대에서 종교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숭실대에서 기독교교육학과를 개설해 6년 동안 가르쳤다. 66년부터 23년 동안 장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고(故) 하용조 목사 등 많은 목회자들이 그를 인생의 어머니요, 스승으로 여겼다. 25세 젊은 나이에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그는 이들 제자를 자식 삼아 평생을 지낸 것이다.
은퇴 이후 그의 시선은 북한과 탈북민에 머물러 있다. 탈북민 정착을 돕기 위해 탈북자종합회관을 세웠고, 영락교회 안에 탈북민 문제를 다루는 남북평화신학연구소도 설립했다. 2005년엔 강교자 전 한국YWCA연합회장 등과 함께 탈북 대학생을 돕는 샬롬 공동체도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탈북 대학생들의 정착 지원을 위해 샬롬 공동체를 운영했습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그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했어요. 방학 땐 수련회도 열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통일시대를 대비했습니다.”
주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은 탈북 대학생들이 지금은 아들딸을 데리고 매달 그의 집을 찾는다. 마지막 주 토요일에 함께 모여 식사하고 예배를 드린다. 많게는 20∼30명이 모인다. 금요일엔 탈북민을 대상으로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성경공부도 진행한다.
주 명예교수는 한국교회가 탈북민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탈북민 세계에도 이단이 판을 친다며 한 말이다. “북한에서 온 젊은이, 노인들을 이단에서 조직적으로 빼가요. 돈을 주고 김치도 해다 준대요. 쌀도 주면서 다독이죠. 탈북민들이 그러더군요. ‘하나님은 믿어요. 그런데 돈을 주는데 왜 안 가요’라고요. 기독교가 무엇인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가르쳐야 합니다.”
막연히 교회에 나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 도움을 주고 정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새문안교회에 다니는 권사 친구는 탈북민을 집에 데려와 한동안 같이 지냈어요. 시장에도 가고 함께 요리해서 먹고, 주일마다 예배 드리러 같이 가고…. 둘은 친구가 됐고 탈북민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나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배워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 명예교수는 인터뷰 중간중간 허리가 아프다며 자세를 고쳤다. 치통도 호소했다. 최근엔 다리, 허리가 많이 아파 혼자 걷기에 조금 불편하다고 했다. “육체가 노화되니깐 괴로운 게 많아요. 옷 입는 것, 화장실 가는 것, 안식관에서 서울을 오가는 것도 힘들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구십 평생 그의 삶은 ‘신행일치(信行一致)’로 점철된다. 불편함을 일상으로 여기며 감사로 살아온 삶이다.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살았을 뿐입니다. 이 땅의 삶은 아침 안개처럼 지나갈 인생이에요. 내 인생은 본향, 즉 하나님 나라에 있답니다. ‘어서 본향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글·사진=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