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불의 벽화

크리스티앙 자카르, ‘그을음의 악보’, 벽에 연소성 젤. 2018. 경기도미술관


붉은빛을 발하며 벽이 타오른다. 훨훨 타던 불이 사그라진 자리엔 검은 그을음이 남았다. 타오름과 소멸을 거듭한 끝에 촘촘한 추상 패턴이 만들어졌다. 비정형의 삼각기둥이 무수히 도열한 ‘불(火)의 벽화’다. 물감도, 붓도 없이 오로지 불꽃을 이용해 벽면에 추상작업을 한 작가는 크리스티앙 자카르(79)다. 프랑스로 이주한 스위스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카르는 불로 그림을 그린다. 그 역시 초창기에는 다른 작가들처럼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새로운 방법이 없을까’ 모색하다가 송진을 발견했다. 화폭에 송진을 바른 뒤 이를 태우며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1970년대 프랑스 미술계에는 때마침 기존 방식의 회화를 해체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창조적 변화를 도모했던 ‘쉬포르 쉬르파스’ 예술운동이 활발했고, 자카르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후 작가는 연소성 젤을 태워 검은 그을음으로 낮과 밤, 삶과 죽음 등 대비되는 세계를 장엄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번 작품은 한국의 경기도미술관이 프랑스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과 공동기획한 ‘그림이 된 벽’전을 위해 올 4월 작업한 벽화다. 자카르는 안산 경기도미술관의 높이 9m, 가로 50m의 드넓은 벽에 ‘그을음의 악보’라는 타이틀로 불의 타오름과 번짐, 꺼짐의 흔적을 구현했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불꽃들이 벽면에 아로새긴 추상화는 거스를 수 없는 생의 명멸을 묵상하게 만드는 현대시(詩)다. ‘그림이 된 벽’전에는 자카르를 필두로, 프랑스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8명의 작가가 저마다 드라마틱한 벽화를 제작했다. 벽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벽이 된 전시장에서 새로운 시지각적 예술체험을 해보는 전시는 6월 17일까지.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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