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이데올로기에 갇혔던 정율성 음악, 다시 울리다


 
중국에서 ‘혁명음악의 대부’로 통하는 한국 출신 작곡가 정율성의 생전 모습. 그의 음악은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갇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으나 근래 화해 무드 속에서 적극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광주문화재단 제공


2014년 7월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은 서울대에서 특강을 가졌다. 당시 한·중 양국의 우의를 다지는 데 공헌한 인물들을 열거하던 그는 진나라 시대 외교관 서복(徐福)에서부터 시작해 제일 마지막엔 한국 음악가 정율성(1918∼1976)을 거론하며 끝맺었다. 2005년 중국 전승절 60주년에 신중국 건국 100인의 영웅 중 여섯 번째로 거론될 만큼 정율성은 ‘혁명음악의 대부’로서 중국에서 더 유명하고 존경받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군가로 정식 채택되었고, 이어 88년 7월 25일 덩샤오핑 주석의 직권으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됐다. 이 행진곡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시절인 38년 작곡한 ‘연안송’과 ‘연수요’는 중국인들에게 아직까지 애창되고 있다. 매해 개최되는 전승절 행사는 물론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그의 음악이 연주됐고 하얼빈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혹자는 중국인으로 오인할 만큼 현대 중국의 역사에 깊이 개입한 정율성은 사실 광주광역시가 고향이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3년 형을 따라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에게는 두 가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의열단 가입과 더불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시작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련 레닌그라드 음악원 크릴노바 교수를 상하이에서 만나 성악과 작곡 레슨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는 본명을 버리고 ‘음악으로 대성한다’는 뜻의 율성(律成)으로 개명하며 예술가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했다. 크릴노바는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적극 주선했지만 정율성은 독립운동에 대한 사명감 때문에 유학을 포기했다.

이후에도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는 늘 녹록지 않은 쪽을 선택했다. 항일운동 중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 여인과 결혼까지 한 그는 45년 해방과 더불어 중국에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북한을 선택했다. 조선음악대학에서 작곡부장을 맡아 다양한 음악 활동을 했지만 파벌싸움에 밀려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는 다시 문화대혁명 중 간첩 혐의로 창작활동을 금지 당했다. 76년 복권 뒤 불과 몇 달 만에 그는 베이징 근교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국인 모두가 알고 있는 ‘정율성’이란 이름이 남한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까닭은 물론 이데올로기의 벽 때문이었다. 그가 공산주의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남구청이 양림동에 있던 정율성의 생가를 복원하고 2005년부터 중국을 오가며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해왔지만 지역 행사에 그쳤을 뿐이다. 이러던 그의 이름이 올해 국내 음악계에서 유달리 자주 거론되며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오는 16일(경남 통영 통영국제음악당)과 다음 달 13일(광주 서구 유스퀘어 문화관)에는 통영-광주 교류 음악회의 일환으로 그가 남긴 성악곡들이 실내악으로 편곡되어 윤이상의 작품과 함께 연주된다.

한편 지난 1일과 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좌우 진영을 대표하던 정율성과 한유한의 작품을 중심으로 제작한 ‘백년의 약속’이라는 제목의 콘서트 오페라가 개최됐다. 우익의 중심에 서 있던 한유한의 오페라 ‘아리랑’과 정율성이 유일하게 남긴 오페라 ‘망부운’을 중심으로 제작된 이 콘서트 오페라는 항일투쟁을 벌이는 청춘들의 이야기로 새롭게 각색됐다.

반공 담론과 정치색으로 오랫동안 외면된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이제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맞이하기 위한 마중물로 소개되고 있다. 내일로 다가온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난다면 더 많은 의미 있는 이름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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