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드라마 스태프인 A씨는 촬영이 시작되고 한 달 째 집에 들어가지 못 했다. 지방 세트장에서 집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왕복 4시간 거리다. 출퇴근은 포기했다. 세트장 근처 찜질방을 숙소로 잡았는데도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정도다. 이렇게까지 해도 수당을 더 받지는 못 한다. 촬영현장의 살인적인 노동은 오랫동안 ‘열정’과 ‘예술’로 당연한 듯 포장돼 왔고, A씨만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A씨 같은 영화·드라마 촬영 스태프의 근무 여건이 달라질 기로에 서 있다. 다음 달부터 일주일 최대 52시간 근로가 처음 시행되는데 특례업종으로 제외됐던 문화 콘텐츠 분야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방송·신문·출판·게임·광고 등 콘텐츠 업계 전체 근로자 44만7390명 중 86.3%인 38만5885명이 무제한이었던 법적 주간 노동 시간이 68시간 이하로 줄어든다. 300인 이상 기업의 6만5741명은 주 52시간으로 노동 시간이 제한되고, 나머지도 2022년 말까지 주 52시간을 맞춰야 한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한 ‘콘텐츠 산업 노동시간 단축 안착을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밝힌 조사 결과다.
이양환 한국콘텐츠진흥원 정책본부장은 콘텐츠 분야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업계 특성상 프리랜서를 상시 근로자로 판단하는지 여부와 근로시간을 산정하는 방식 등은 앞으로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다음 달 중 콘텐츠 분야 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하반기에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현장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근로기준법이 바뀌면 지금과 같은 인력 구조로는 밤샘 촬영이 불가능해지면서 영화나 방송을 찍는 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단기간 촬영 관행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인건비 상승이 불가피하다. 근로자들은 수입 감소를, 업계는 비용 증가를 우려하고 있다.
박상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국장은 “16부작 미니시리즈를 기준으로 (인력을 늘리지 않으면) 제작 기준이 100일에서 200일까지 늘어난다”며 “방송계 종사자들이 다른 작품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에 소득 감소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영화 분야를 대표해 나온 장은경 미디액트 사무국장은 “사업장 규모를 기획 단계, 촬영, 후편집 등 영화의 제작 단계마다 채용하는 인원수를 파악해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건비 상승, 제작 기간 증가 등을 걱정하는 콘텐츠 분야 기업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의견도 적잖다. 방송 쪽 프리랜서로 12년 동안 일해 온 최모(38)씨의 지적이다. “케이블 TV, 종합편성채널 등이 많이 생기면서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그 덕에 연예인들 몸값이 엄청 뛰었다. 연예인 출연료는 쉽게 올려주면서, 스태프 인건비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모습을 보면 환멸을 느낀다. 스태프 수백명의 희생에 기대서 작품을 만드는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