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매체들이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관련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동선 노출을 극도로 꺼려하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외국 방문 일정을 북한 매체가 사전 공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체제 보장을 전제로 한 북·미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이를 지렛대 삼아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리를 비워도 북한 체제는 굳건하다’는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분석도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북·미 정상회담 의제 관련 보도에서 “달라진 시대적 요구에 맞게 새로운 조미(북·미) 관계를 수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신문 역시 1면에 ‘새로운 조미(북·미) 관계 수립’을 언급한 뒤 6면 개인필명의 정세 논설에서 “(미국이) 우리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우호적으로 나온다면 대화와 협상을 통해 오해와 불신을 가시고(씻어내고) 관계 개선과 정상화를 실현하자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며 입장”이라고 했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맹비난해 왔던 북한 관영 매체들이 일제히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을 거론한 것이다.
북한 매체의 이런 보도는 경제발전을 위한 김 위원장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경제적 보상을 노린 거래’라는 시각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대북 제재를 풀지 않는 한 경제건설 목표를 달성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급격한 북·미 관계 개선을 이루기 전에 북한 주민들에게 관련 내용을 일정 수준 공유할 필요도 있다.
북한은 지난 4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이 마무리됐음을 선포하고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한다는 내용의 새 전략 노선을 채택했다. 일각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에 앞선 실무협상 과정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북한 매체가 김 위원장과 외국 정상의 회담 일정을 사전 보도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분석했다. 북한 매체는 최근 두 차례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 관련 보도를 모두 김 위원장의 귀환 후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등 내부 일정도 다음 날 보도해 왔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 위원장이 조미 수뇌상봉(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중국 전용기를 타고 싱가포르로 떠났다고 자세히 소개했다. 보도에는 ‘중국 전용기’라는 단어가 2차례 나온다. 특히 노동신문 1면에 게재된 김 위원장 사진에는 중국 전용기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찍혀 있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됐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 주민들이 볼 수 있는 노동신문 1면에 중국 국적기 사진이 실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김 위원장이 현 체제를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점과 돈독한 북·중 관계를 보여주려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상국가 이미지를 내세우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북한 매체들은 지난 4월 27일 김 위원장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평양을 출발했다는 사실을 전격 공개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나기 시작한 선전선동 기법”이라며 “회담 의제뿐 아니라 중국 전용기를 이용한 점 등은 모두 나중에 밝혀질 사실인데 새삼 숨길 필요가 없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