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은 6·25 발발 10일 만인 1950년 7월 5일 오산전투에서 맞부딪친 후 70년 가까이 적대 관계를 지속해 왔다. ‘미제 승냥이’와 ‘악의 축’으로 서로를 적대시해 온 두 나라는 냉전의 한기가 물러난 뒤에도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했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지속하려는 북한과 이를 제지하려는 미국은 주기적으로 위기를 반복해 왔다. 전쟁을 눈앞에 둘 정도로 멀어졌다가 정상회담 성사 직전까지 거리를 좁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12일 북·미 정상회담은 두 나라 70년사의 거대한 매듭이면서 새로운 70년을 여는 전기가 될 전망이다.
북한과 미국은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전쟁에 버금가는 긴장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한국전쟁 기간 내내 미국 전폭기의 폭격에 시달렸던 북한은 미국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었고, 미국은 전쟁 이후 또 다른 공산진영과의 전쟁인 베트남전쟁 등을 겪으면서 북한에 대한 감시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후 긴장상태가 표면화된 대표적인 사건이 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다. 북한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1·21 사태’와 북베트남군의 ‘구정 대공세’(1월 30일) 사이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승무원 82명과 배가 억류되고 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미국은 공해상에서 나포됐다고 주장했으나 북한은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두 나라는 30차례 가까운 비밀 접촉 끝에 그해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를 판문점을 통해 귀환시키는 데 합의했다.
69년 4월 15일 미군 정찰기가 동해상에서 격추당한 사건과 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도 전후 대표적인 물리적 충돌사건으로 꼽힌다. 이 중 76년 북한 경비병들이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도끼 만행사건으로 미국은 항공모함과 순양함 등을 한국 해역에 급파하면서 북한을 압박했다. 미군이 사건의 도화선이 된 미루나무를 절단하고, 김일성 주석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87년 11월 29일 북한의 대한항공(KAL) 여객기 폭파사건 이후 미국이 이듬해 1월 2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등 두 나라는 냉전의 양극단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91년 소련의 붕괴로 시작된 냉전 종식 도미노도 북한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89년 프랑스 상업위성 스포트(SPOT)가 북한 영변 핵시설을 촬영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새로운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92년 1월 22일 정전 후 최초의 북·미 고위급회담이 뉴욕에서 열렸으나 북한은 이듬해 3월 12일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 강요에 반발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졌다. 94년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과 제네바 기본합의서 채택으로 1차 북핵 위기는 다행히 봉합됐다.
이후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회담과 조명록 북한 인민군 차수의 방미(2000년 10월 10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의 방북(2000년 10월 23일)으로 두 나라는 관계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2001년 1월 20일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과 이듬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두 나라 관계가 다시 악화됐다. 2002년 10월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보유를 시인하고 2003년 1월 10일 NPT를 탈퇴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터졌다. 양국은 6자회담으로 해법을 모색했으나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하는 등 위기가 반복됐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관계 개선의 기대가 높아졌으나 ‘전략적 인내’로 대표되는 오바마의 대북 정책과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 등 무력도발로 두 나라는 평행선을 긋기만 했다.
관계 개선 돌파구는 아이러니하게 2017년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찾아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햄버거 대화’를 공언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취임 초 북한의 6차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에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에 뒤이은 김 위원장의 대화 제안을 흘려보내지 않고 화답하며 70년 만의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