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첫 만남에서 북·미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을 포괄적으로 합의하는 성과를 냈다. 구체적인 내용은 후속회담과 실무협상에서 다루기로 했지만 두 정상은 앞으로도 정상외교를 이어가기로 하는 등 두 나라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두 정상이 첫 만남에서 양국의 관계 개선을 선뜻 합의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당장 북·미 수교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두 나라의 관계 개선은 남북 관계는 물론이고 동북아 안보지형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안이다. 북·미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이후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던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청산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가장 많이 요구한 체제안전 보장과 직결된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대북정책 기조인 ‘최대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에서 ‘최대의 압박’은 사라지고 ‘최대의 관여’만 남게 됐다.
북·미가 적대관계를 청산하면 한반도를 65년간 지배해온 정전체제도 붕괴된다. 이날 두 나라 정상이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에 합의한 것은 북·미 관계 개선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후속조치다.
그러나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전체제를 만든 주요 당사국들의 동의와 참여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동북아 다자안보체계가 들어설 경우 일본도 가세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일본도 참여하기로 돼 있는 만큼 북·일 관계 개선 노력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면 북·일 정상회담과 양국 수교 협상도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합의는 이처럼 동북아의 안보지형을 뒤흔드는 파장을 낳게 된다.
평화체제로 전환되면 가장 민감한 주제가 주한미군 철수 여부다. 현재까지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군 문제가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르지 않았다고 강조했지만 한반도의 종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주한미군 주둔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큰 관심이었던 비핵화 이행방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쉽지 않은 협상과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북한의 화끈한 비핵화 조치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이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9일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수락한 이후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회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았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날까지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전날 오후 늦은 시간에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나타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성과”라고 강조하면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폼페이오 장관이 CVID 원칙을 새삼 강조한 것은 합의문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결국 합의문에 CVID는 명기되지 않았다.
다만 두 정상은 이번 회담을 통해 서로 상대에 대한 호감을 확인하면서 신뢰 형성의 토대를 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식을 마치고 김 위원장과 헤어지고 난 뒤 기자들에게 “김 위원장이 매우 재능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며 “앞으로 김 위원장을 여러 차례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는 매우 똑똑한 협상가였다”며 “그를 매우 좋아하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며 “우리한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눈과 귀를 가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하지만 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늦었지만 이 자리까지 왔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회담이 끝난 뒤 상대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말(言)의 전쟁’을 치른 걸 감안하면 놀라운 변화다. 이런 두 사람의 신뢰는 이날 성명에 담을 수 없는 무형의 성과다.
싱가포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