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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20세기 역사를 뒤흔든 혼돈의 6개월

1945년 2월 열린 얄타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앞줄 왼쪽부터). 이들 지도자는 당시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인물로 이른바 ‘3거두(The Big Three)’로 불리곤 했다. 모던아카이브 제공






프랑스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산문집 ‘섬’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비단 사람의 일생에만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지난 세기 지구촌을 냉전의 시대로 만든 과정에서도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은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1945’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는 책이다. 한반도의 지난 6개월이 남북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분수령이었듯 1945년 2∼8월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시기였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28년간 외신기자 생활을 했던 마이클 돕스(68)가 썼다. 그는 외교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성인이 돼서는 냉전의 현장을 취재하는 데 젊음을 바쳤다. ‘1945’는 저자가 펴낸 ‘냉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1997년 소련의 붕괴 과정을 전한 ‘빅브라더를 타도하자’를 펴냈었다. 2008년에는 냉전의 클라이맥스로 일컬어지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0시 1분 전’을 내놓은 바 있다.

저자는 ‘1945’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 서문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을 이렇게 규정한다. “대포의 시대가 원자폭탄의 시대로 이어지고, 종말을 맞이한 제국의 사투는 신생 초강대국의 탄생에 따른 산고로 이어졌다. 겉으로는 동맹이었지만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두 강대국의 군대가 유럽의 심장부에서 만난 것도 이때였다.”

이야기의 시작은 얄타회담이다. 이 회담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크림반도 얄타에 모여 2차 대전의 종식을 논의한 자리였다. 저자는 회담의 기승전결을 세세하게 그려낸 뒤 루스벨트의 사망,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포츠담회담 개최 등 그 시절의 결정적 장면들을 하나씩 소개한다.

사실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인터넷만 찾아봐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앤터니 비버의 ‘제2차 세계대전’처럼 이 시기를 다룬 명저도 한두 권이 아니다. 그럼에도 ‘1945’를 소개하는 건 이 책이 선사할 재미가 상당해서다. 방대한 사료를 엮어 구성지게 풀어낸 저자의 솜씨는 노련하고 화려하다. 이런 필력 덕분에 독자들은 책을 읽는 내내 안방극장이나 영화관에서 근사한 시대극을 관람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저자는 지도자들이 모여 회담을 할 때 어떤 숙소에서 묵었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촘촘하게 그려낸다. 강대국 리더들의 특징을 소개한 내용도 인상적이다.

“루스벨트는 한 번에 여러 공을 던지며 곡예를 펼쳤다. 그가 던진 공은 국내 정책, 대외 정책, 전쟁 수행, 스탈린의 요구, 처칠의 기분, 사상자 숫자, 대중 여론 등이었다. 루스벨트는 이상주의와 냉소주의, 자신감과 교활함과 비범함이 한데 뭉친 존재였다.”

“처칠은 머릿속에 기억할 만한 대사를 입력한 뒤 루스벨트 앞에서 말하기 전 ‘비밀 모임’에서 테스트했다. (처칠은) 중요한 행사에서 돋보이기 위해 에너지를 분배할 줄 알았다.”

“스탈린은 토론의 달인이었다. 최소한의 단어를 썼다. 그러면서도 기관총을 쏘듯 생각을 쏟아냈다. 기억력도 매우 좋았다. 반대 주장을 들으면 분석을 한 뒤 요점을 말했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동맹 관계였던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라이벌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강대국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다가 자주 상대의 뜻을 오해해 토라졌고, 잇속을 차리는 데 몰두하느라 자주 거짓말을 주고받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였다. 하지만 냉전의 신호탄은 이런 장면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포츠담회담의 마지막을 묘사한 대목인데, 여기에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스탈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트루먼은 다음 회담은 워싱턴에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무신론자 국가의 지도자(스탈린)는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하지요.’ 대통령과 대원수는 악수한 뒤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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