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핵 협상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비핵화의 수준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로 정하면 이번 협상은 성공한 협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조차 “CVID가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했는데 이를 관철하지 못했다. 공동성명은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고 했을 뿐이다. 최소한 4·27 남북 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에서 밝힌 것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거나 표현 수위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장은 다르다. 그는 13일 트위터를 통해 “싱가포르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큰 진전을 이뤘다”고 자평했다. 또 “모든 사람이 북한과 회담하기 전보다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다”며 “북한으로부터 더 이상 핵 위협은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더 이상 북한의 로켓 발사도, 핵실험이나 연구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말은 핵무기 개발의 ‘동결’을 의미하는 것일 뿐 CVID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를 ‘큰 진전’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 스스로 내건 목표에도 못 미친다.
사실 CVID는 단기간에 이루기 어려운 목표다. 사찰과 검증까지 거쳐 핵 폐기를 완벽하게 확인하기까지 15년이 걸린다는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에 CVID를 달성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북한은 CVID라는 말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미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굳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사용했던 공격적 용어를 고집하느냐며 반발한 것이다. CVID는 학술적으로 정립된 용어도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Ireversible)’ 핵 폐기는 ‘완전한(complete)’ 핵 폐기란 말과 다르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CVID를 관철하지 못한 이유로 “시간이 부족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두 번, 세 번 만난다고 해서 CVID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은 향후 사찰과 검증을 통해 김 위원장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 ‘완전한 비핵화’를 실천하는지 확인하겠다는 입장이다.
주목할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CVID를 얻어내지 못했는데도 김 위원장을 믿는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넨 두 가지 선물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도중 미 정보 당국이 파악한 북한의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쇄를 요구했다. 김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까지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런 사실을 공개하면서 김 위원장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이미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3명을 돌려보내준 김 위원장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했던 트럼프 대통령이다. 유해 송환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가 될 수 있다. 김 위원장도 이를 꿰뚫어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장기전으로 잡고 있다. 핵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을 개방시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와 2년 뒤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결코 손해볼 것이 없다는 계산이다. CVID가 빠진 합의를 기뻐하는 이유일 것이다.
싱가포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