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땅과 생명, 그리고 인간

임옥상 ‘보리밭’, 캔버스에 유채. 94×130㎝. 1983,4 서울옥션


초록빛 보리밭 너머로 반백의 농부가 서있다. 뙤약볕 아래 검게 그을린 농부의 얼굴과 잘 자란 보리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화면을 상하로 과감히 분할해 하단에는 보리를, 상단에는 농부를 배치한 구도가 절묘하다. 윗옷을 벗어젖힌 채 화면 밖 감상자를 응시하는 촌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너희들 밥상에 오르는 알곡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느냐?’고 묻는 듯하다.

일체의 주변 설명을 생략하고, 보리밭과 농부만을 화폭 가득 그려 넣은 작가는 민중미술 진영의 대표주자 임옥상(1950∼)이다. 그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던 서른 중반에 그린 이 유화는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든다. 도시인들에겐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된 땅과 흙, 농촌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설득력 있는 작품이다.

임옥상은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대학강단에 서며 그림을 그렸다. 그 자신이 이촌향도(離村向都)의 거센 물결을 체험한 세대로, 땅이 인간 삶을 지탱하는 터전인 동시에 근대화, 산업화가 잉태한 구조적 모순이 발화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에 한동안 흙과 생명, 노동과 공동체를 통찰한 작업을 이어갔다. 척박한 대지에서 솟구쳐 오르는 어머니를 표현한 조각, 고단한 밭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부조(릴리프)로 형상화한 작품은 ‘임옥상’이란 이름 석 자를 널리 각인시켰다. 이후 작가는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를 예술적 의제로 끌어내며 회화, 조각뿐 아니라 공간설치, 소셜 퍼포먼스로 작업의 지평을 넓혀왔다. 예민한 사안을 다루기에 호불호가 엇갈리지만 ‘아틀리에에 파묻혀 예쁜 그림만 그릴 순 없다’는 이 선 굵은 예술운동가는 오늘도 종횡무진 뛰고 있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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