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이르면 이번 주 시작될 북·미 고위급 후속 협상에서 북한에 핵 프로그램 리스트 신고를 우선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비핵화 목표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가운데 ‘V(verifiable·검증 가능한)’를 구체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외교소식통은 17일 “미국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과제는 검증 가능한 비핵화이고, 검증의 시작은 신고”라며 “미국은 신고 대상 핵시설과 핵물질, 핵무기의 범위를 정하는 작업부터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이를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양측이 최대한 시기를 앞당기면 앞으로 한 달 내에 폐기 대상 목록을 정하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및 미국 사찰단의 방북 수순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의 시한을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가 끝나기 전인 2020년 말로 잡고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 전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자국 내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비핵화의 핵심인 검증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후속 협상의 키를 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14일 중국 베이징 방문 때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북한 핵 프로그램의 범위와 규모를 가능한 한 빨리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북한이 핵 정보를 다 공개할 것으로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향후 몇 주 안에 북한과 협력해 이를 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국이 제시할 체제안전 보장책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는 쪽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첫 만남에서 꽤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는 점, 오는 8월 예정된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이 중단될 가능성 등 달라진 정세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북핵 협상에서 검증은 ‘딜(deal) 브레이커’라고 불릴 만큼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비롯해 과거 주요 비핵화 합의가 깨진 결정적 이유도 검증을 둘러싼 이견 때문이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미 고위급 협상에서 신고, 검증, 폐기의 절차를 정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양측이 프레임(이행구도)을 짜면 정상회담을 한 차례 더 열어 종전선언을 한 뒤에 검증 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6·12 정상회담 이후 북·미가 ‘단계별 동시 행동 원칙’에 인식을 같이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검증 과정에 들어가기 전 그에 따르는 체제안전 보장 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소식통은 “북·미 모두 정상회담을 복기하고 후속 협상의 의제와 전략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르면 이번 주에 고위급 접촉이 있을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협상으로 들어가려면 다소 시일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속 협상의 실무를 맡을 미 국무부 내 진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도 변수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핫라인’이 본격 가동되면 비핵화 협상은 한층 속도를 낼 전망이다. 양측 고위급 채널이 가동되는 동시에 탑다운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어서 불필요한 절차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