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에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비석을 ‘백비(白碑)’라고 합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조선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아곡 박수량의 백비가 있습니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 형·예·공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했지만 어찌나 청렴했든지 돌아가신 후에 그의 상여를 메고 고향에도 가지 못할 만큼 곤궁했습니다. 명종은 그의 충정을 귀하게 여겨 비석과 청백당을 하사했습니다. 비석에는 그의 청렴결백을 높이 기리기 위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무명용사비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모를 용사를 위해 세운 백비입니다. 강원도 화천의 옛 6·25전쟁 격전지에 목비(木碑)가 서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낡은 백비입니다. 궁노루 울음소리 산을 울릴 때 달빛 타고 서 있는 목비를 보며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이 세상엔 허명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무수합니다. 그러나 허명은 밤나무가지에 높이 매달린 밤송이와 같아서 바람에 흔들릴수록 껍데기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명에 연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만이 참된 이름입니다.
한상인 목사 (광주순복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