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 덧집 아래 미륵사지 서쪽 석탑이 위용을 드러냈다. 옥개석은 처마같이 날렵했고, 원래 석탑의 돌이 81% 사용된 탑은 1300여년 전 백제탑의 고풍스러운 멋을 풍겼다. 1992년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이 ‘현대 탑’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국보 11호인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20일 개보수 20년 만에 언론에 자태를 드러냈다. 1998년 구조 안전진단에 이어 해체·수리에 들어간 지 20년 만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인 639년에 완공됐다. 백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아파트 5층 높이(14.5m)로 동아시아 최고(最古), 최대 규모인 이 탑이 한국 문화재 보존 과학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석탑은 조선 후기 탑의 서쪽 절반이 부서진 채 6층까지만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 학술조사를 거쳐 붕괴된 부분을 콘크리트로 보강했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단장은 “우리는 복원이 아니라 ‘보수’라는 용어를 쓴다”며 “보수 정비는 추정 복원을 지양하자, 동탑처럼 복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설명했다. 9층 여부 논란이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 보존된 6층까지만 살린 이유다. 9층 탑으로 상륜부까지 복원한 동탑의 구부재(舊部材) 사용률이 5% 미만인 것과 달리 이 서탑은 재활용률이 80%가 넘는다. 옛 돌의 깨진 부분을 지역 화강암으로 합체해 마치 화상 자국 같은 흔적이 기단 갑석 등 곳곳에서 눈에 띈 것도 그런 이유다. 일제강점기 때 흉물스럽게 바른 총 185t의 콘크리트를 뜯어내는데도 3년이 걸렸다.
전통기술로 원형 유지가 어려운 경우 현대기술로 보완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단일 문화재 수리로는 최장인 20년이 걸렸다. 석가탑 보수도 6년에 불과하다. 투입된 예산도 230억원으로 숭례문 다음으로 많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현용 연구사는 “석가탑은 부재가 30여개에 그쳤는데, 미륵사지 서탑은 1600개가 넘었다”며 “그럼에도 거의 재활용돼 문화재의 진정성이 확보됐고 이는 백제역사지구가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수리 기간 중인 2009년 석탑 1층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2018년 보물지정예고)와 함께 ‘639년 왕후가 이를 봉안했다’는 기록도 나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가설구조물의 철거공사를 거쳐 12월까지 완전한 모습을 공개한다. 준공식은 기록에 따라 봉안 1830주년을 맞는 내년 3월 12일 이뤄진다.
익산=손영옥 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