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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일급 가이드와 떠나는 역사 패키지 여행

유시민은 촛불이 들불처럼 번진 2016년 겨울 ‘역사의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책의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역사의 역사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를 알면, 시간이 지배하는 망각의 왕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온갖 덧없는 것들에 예전보다 덜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돌베개 제공




저자가 ‘지식 소매상’을 자처하는 사람이니 이런 비유도 가능할 것이다. ‘역사의 역사’라는 간판이 내걸린 가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판매대에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역사서 18권이 진열돼 있다. 책방 주인은 스타 작가인 유시민(59). 그는 손님을 상대로 살뜰하게, 때로는 명쾌하게 이들 역사서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면서 흥정에 나선다.

유시민이 누구이고, 그의 필력이 어느 정도인지 소개하는 건 사족일 것이다. 유시민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1988)를 시작으로 지난 30년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다. 그가 펴낸 책들은 한국에서 교양서가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 보여준 척도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한때 서점가엔 ‘유시민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의 신작인 ‘역사의 역사’가 무슨 내용인지 가늠하려면 부제를 보면 된다. ‘HISTORY OF WRITING HISTORY(역사 서술의 역사)’. 즉, 사학사(史學史)를 다룬 책이라는 거다. ‘역사의 역사’에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를 시작으로 사마천과 에드워드 카, 유발 하라리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이름난 역사가의 명저가 차례로 등장한다.

특유의 박람강기한 재능으로 유명 역사서를 독파한 ‘유시민의 독서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갖는 매력은 이런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을 듯하다.

유시민은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개관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언급한다. 다이아몬드는 유라시아 대륙이 다른 지역보다 문명 발전이 빨랐던 이유로 네 가지를 꼽았다.

①유라시아에는 가축이나 작물로 삼을 만한 동식물이 많았다. ②유라시아는 가로로 길쭉한 땅이고 중간에 지리적 장애물이 적어 문명이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③아메리카 대륙과 호주는 고립도가 높았다. ④유라시아는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 발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유시민이 주목하는 건 저런 내용이 아니다. 다이아몬드가 ①∼④번을 차례로 기술한 뒤 덧붙인 문장이다.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즉 ‘총, 균, 쇠’의 미덕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막연한 상상력에 의지해 눙치고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역사서라는 데 있다는 거다. 유시민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다이아몬드는 역사학과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더 나아가 과학과 역사학을 구분할 수 없게 뒤섞어 버렸다.”

그렇다면 유시민이 생각하는 훌륭한 역사서는 어떤 책일까. 그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도 적었다. 이런 기준에서 그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책은 사마천의 ‘사기’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그는 ‘사기’를 거론하면서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다”고 격찬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언급할 땐 이렇게 말했다. “카의 말이 가장 빛나는 곳은, 역사를 문학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책에 실린 문학적인 문장을 소개한다. 유시민이 왜 이 책을 사랑하는지 짐작케 하는 문구다.

“사실이 스스로 이야기한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가가 이야기할 때만 사실은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역사가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안에 무엇인가를 넣어 주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한다.”

‘역사의 역사’ 같은 책이 갖는 흠결은 ‘깊이’일 것이다. 이런 책을 펴내는 저자는 주마간산 수준으로 여러 텍스트를 스치듯 소개하면서 넘어가게 된다. 유시민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을 “왕궁과 유적과 절경 사이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잠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인증 사진을 찍는 패키지여행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몇몇 유명 역사서가 빠진 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좀 더 깊은 얘기가 담겼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역사의 세계로 패키지여행을 떠날 때 유시민은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일급 가이드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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