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연일 기승이다. 가마솥 무더위에 불쾌지수도 높아져 몸도 마음도 피곤해진다. 더위를 피해 계곡이나 바다로, 또는 숲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할 필요 없다. 전남 장흥으로 ‘무(無)더위’ 피서를 떠나보자. 번잡한 유명 피서지보다 덜 알려진 해변과 강, 계곡, 숲이 모두 모여 있다. 조용한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이다.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정남쪽에 자리하고 있어 ‘정남진 장흥’으로 불린다. 용산면 상발리 남포마을 앞바다에 소등(小燈)섬이 있다. 먼바다에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작은 호롱불을 밝힌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인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바다의 용이 승천하지 않고 섬 주변을 휘감고 영원히 머물고 있다는 전설도 있다. 삶과 죽음을 다룬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촬영된 곳이다.
작은 바위섬 꼭대기에 어렵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한 폭의 그림이다. 겨울철 소등섬 위로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해뜨는 곳이 많이 벗어나 있어 아쉽다. 하지만 멀리 떠오르는 태양이 섬 근처 구름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것만으로도 손색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천천히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남해 청정해역인 득량만을 마주하고 있는 안양면 수문해수욕장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호젓하다. 백사장 주변에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어우러져 있고, 갯벌과 해수욕장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소나무 숲에서 캠핑을 즐기는 것도 좋다. 벤치와 정자가 여러 곳에 마련돼 있어 돗자리 하나만 깔아도 근사한 보금자리가 만들어진다.
주변에 종려나무 거리가 11㎞에 걸쳐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동남아의 유명 휴양지에 온 기분도 든다. 해변 끝자락엔 700m 길이의 ‘한승원 문학 산책로’가 이어진다. 한승원은 2016년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다. 그늘에서 장흥 출신 문학가 이청준 한승원 등의 작품에 파묻히면 책 한 권은 금세 뚝딱이다.
수문마을은 ‘장흥 삼합’에 들어가는 키조개의 본고장이다. 마을에서 나오는 수산물의 80%는 키조개다. 키조개는 다른 조개보다 미네랄이 5∼20배 많고 필수 아미노산과 철분이 풍부한 ‘바다의 보물’로 알려져 있다.
장흥의 숲과 계곡은 휴양림에서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유치자연휴양림이다. 유치면 옹녀봉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이뤄진 무지개폭포와 옹녀폭포, 그리고 협곡에 만들어진 웅장한 기암괴석 등이 아름다운 ‘숲 동산’을 펼쳐 놓는다.
휴양림 일대에는 비목나무·가래나무·비자나무·굴피나무·참나무·산수유·고로쇠나무·산벚나무·단풍나무 등 400여 종의 온·난대림 식물이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숲속에 들어서는 순간 향긋한 나무 내음이 온몸을 감싼다. 통나무집을 지나 계곡을 따라 폭포까지 이어지는 길은 왕복 1시간 정도 거리지만 맑은 초록의 기운이 폐부에 가득 차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숲길 들머리 계곡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가 절정의 풍경을 내놓는다. 맑은 물이 머무는 소(沼)는 하늘의 파란색과 나무의 초록빛을 그대로 담고 있다. 산 정상의 미끈한 바위에 마음을 빼앗기면 한동안 발길을 멈추게 된다.
휴양림 내에는 통나무집·물놀이장·놀이터·야영장 등 각종 운동·놀이시설이 마련돼 있어 휴가철 가족이나 친구끼리 여행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특히 편백으로 지은 통나무집은 울창한 숲속에 들어서 있다. 창문만 열어도 바로 눈앞에 수십m에 달하는 베틀바위를 내다볼 수 있다.
장흥읍 편백숲 우드랜드는 억불산 기슭 100㏊에 이르는 휴양지다. 편백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성분은 방문객의 몸과 마음을 심리적으로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높이 517m인 억불산은 주 능선에 기암괴석이 많은 장흥의 명산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로는 3736m 길이의 ‘말레길’이다. 말레는 옛집의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대청(大廳)을 일컫는 전라도 사투리. 정상까지 계단 대신 완만한 나무데크가 설치돼 있어 유모차나 휠체어도 오갈 수 있는 길이다.
길에 들어서면 편백이 하늘로 쭉쭉 뻗었다. 편백숲과 대나무숲을 지나면서 저절로 삼림욕을 하게 된다. 숲 사이로 난 길이 정갈하다. 걸리적거리는 것이라곤 없다. 길 곳곳에 전망데크가 마련돼 있다. 내려다보는 편백숲이 장관이다. 그 너머로 장흥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아기를 업은 며느리 형상을 한 거대한 바위가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 ‘며느리 바위’다. 옛날 구두쇠 영감이 시주승을 박대하자 며느리가 대신 용서를 빌었다. 승려는 며느리의 효심에 감복해 ‘모월 모일 이곳에 물난리가 날 것이니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산으로 피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마음씨 착한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시아버지의 부름에 앞산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며느리가 돌로 변해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며느리 바위 가는 길에는 나무데크가 깔려 있지 않다.
해발 518m의 억불산 정상에 서면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과 어우러진 산자락의 곡선이 부드럽다. 바로 앞에는 사자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고 멀리 천관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유치면 국사봉(613m)에서 발원해 남해로 흘러드는 55㎞ 길이의 탐진강은 장흥읍내를 관통하며 흐른다. 이곳에서 오는 27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제11회 정남진장흥물축제’가 열린다.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시원한 물줄기 속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여름 최고의 축제다.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며 더 강력한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게릴라 부대와 물싸움 교전 퍼레이드를 벌이는 거리퍼레이드 살수대첩부터 물싸움, 물풍선싸움, 다양한 육상·수상 이벤트 등이 7일간 시원하게 펼쳐진다. 모래사장, 파라솔 등 해변 분위기가 물씬 나는 휴식 공간인 장흥 플라주와 수중 포토존, 트릭아트존으로 재미를 선사할 굴다리 미술관도 새롭게 선보인다.
축제 대표 프로그램인 거리퍼레이드 살수대첩은 28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장흥군민회관에서 중앙로를 거쳐 축제장인 장흥교 주차장까지 이어진다. ‘살수대첩이 들려주는 장흥이야기’를 주제로 거리 곳곳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고 여기저기서 물 폭탄이 떨어진다.
27일부터 매일 오전과 오후 한 시간씩 탐진강 변에서는 사방에서 정신없이 날아오는 물대포와 물풍선, 그리고 물총이 한데 어우러져 지상 최대의 물싸움이 펼쳐진다.
올해 장흥물축제를 대표하는 새로운 킬러 콘텐츠로 기획한 지상 최대 물풍선 싸움은 시원한 물이 담긴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빨강, 파랑, 노랑 풍선 20만개가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물폭탄을 터뜨린다. 60t의 시원한 물이 만들어낼 색색의‘난장 파티’가 펼쳐진다.
여행메모
행사 곁들인 ‘축제 장터’ 토요풍물시장
한우·키조개·표고버섯 ‘장흥삼합’
수도권에서 승용차를 이용해 유치자연휴양림으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논산천안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차례로 타고 가다 북광산나들목에서 빠져 운수나들목으로 가서 무안광주고속도로에 올라선다. 이후 서광산나들목에서 나와 49번 지방도와 1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가다 부덕교차로에서 23번 국도를 이용하면 빠르다. 유치자연휴양림에서 장흥읍내로 가려면 부유로를 이용하다 부산사거리에서 23번 국도를 타면 된다.
버스는 서울 센트럴터미널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50분까지 하루 7회 운행한다. 약 5시간 소요. KTX나 SRT를 이용한다면 광주나 나주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장흥까지 가야 한다.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오전 6시5분부터 오후 8시35분까지 하루 26회 운행한다. 약 1시간50분 걸린다.
읍내 탐진강변 토요풍물시장은 다채로운 행사도 곁들인다. 매주 토요일 장흥 특산물이 다 모여들어 축제처럼 장터가 벌어진다. 천관산자연휴양림, 유치자연휴양림 등 숲속에서 하루 묵을 수 있다. 탐진강변 심천공원 오토캠핑장에서 캠핑을 즐겨도 된다.
장흥 특유의 먹거리로 ‘장흥삼합’이 있다. 특산물인 한우·키조개·표고버섯을 함께 싸 먹는 음식으로, 재료마다 특유의 향이 잘 어울린다. 만나숯불갈비(061-864-1818)가 유명하다. 수문해수욕장 앞 바다하우스(061-862-1021)의 바지락회무침과 우리집횟집(061-867-5208)의 된장물회·갯장어 샤부샤부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여름철 먹거리다(정남진장흥물축제추진위원회 061-863-7071).
장흥=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