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 주인공은 ‘서동왕자’ 백제 무왕이었다”

문화재청이 100년 만에 재발굴한 전북 익산 쌍릉의 대왕릉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나와 무덤 주인의 성별을 파악하는 열쇠가 됐다. 분석 결과 50∼70대 남성의 인골로 확인이 돼 대왕릉이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사진은 대왕릉 외부 전경. 뉴시스
 
무덤 내부. 문화재청 제공
 
무덤 주변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인골함에서 출토된 뼈들. 뉴시스


50∼70대 남성 추정… 탄소 연대 측정도 7세기 사망
최전성기 무왕 생애와 일치 법의학적으로 뒷받침 증거
선화공주와의 러브스토리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내년쯤 소왕릉도 발굴 예정


“그럼 그렇지!”

무덤에서 나온 인골(人骨)이 50∼70대 남성 것이라는 보고가 나오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이상준 소장은 무릎을 쳤다. 마지막 관문인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도 기대한 대로였다. 인골 주인이 7세기 초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이 됐다. 전북 익산 쌍릉의 큰 무덤(대왕릉) 주인의 실체가 백제 최전성기인 30대 무왕(재위 600∼641)임이 고고학적 증거를 넘어 법의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순간이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8일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쌍릉 출토 인골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고고학 법의인류학 유전학 암석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총동원됐다. 이 소장은 “쌍릉의 인골 주인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고 말했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 처음 나온다.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가 발굴한 후 백제 왕의 무덤이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후 100년 가까이 대왕릉은 삼국유사 속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 이곳에서 180m 떨어진 소왕릉은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인근에는 무왕이 천도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도 있어 그럴듯했다. 고고학적 증거도 이를 뒷받침했다. 무덤 길이가 380m로, 사비기 최대 왕릉인 능산리 동하총(길이 326m)보다 컸다. 이런 규모는 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015년 말, 고고학계의 견고한 믿음에 균열이 갔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 무덤에서 나온 치아 4개를 분석한 결과, 크기와 마모 정도로 봐서 20대 여성의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기 때문이다.

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문화재청은 결국 지난해 8월 100년 만에 대왕릉 재발굴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올 4월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수습됐다. 과연 무덤 주인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뚜껑이 열린 결과, 남자로 판명이 난 것이다. 102개 뼛조각을 조사했더니, 팔꿈치 뼈의 각도 등을 토대로 남성임이,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로 봐서 키는 161∼171㎝로 추정됐다. 당시로서는 큰 키로, 삼국사기에서 무왕을 ‘풍채가 훌륭하고’라고 묘사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3년 전 국립전주박물관의 치아 감정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가톨릭의과대학 이우영 교수는 “인골 상자에서 치아 2개가 새로 발견됐다. 전주박물관이 분석한 것과 비교하니 각각 아래턱, 위턱에 속한 것으로 모두 한 사람 치아로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치아로 성별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인골로 봐서 치아도 남자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반박했다.

이병호 국립익산박물관장은 “인골 분석을 통해 논란을 불식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백제사에서 익산이 차지하는 위상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왕 때를 조선의 정조에 버금가는 ‘백제의 르네상스’로 비유했다.

그럼에도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문화재청은 내년쯤 소왕릉 발굴에 들어간다. 여자의 무덤으로 밝혀지더라도 주인이 선화공주라 단정할 수 없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안기에서 무왕의 비는 백제 최대 귀족인 사택씨(砂宅氏)인 것으로 나온 바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지명처럼 문자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모든 게 2% 부족하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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