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지속가능한 문화정책의 뿌리 ‘예술 영재 육성’


 
1998년 금호영재콘서트를 시작한 박성용 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이 생전에 금호영재들과 함께한 모습. 국민일보DB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성장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손열음, 선우예권,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왼쪽 사진부터). 국민일보DB


핀란드 지휘자 한누 린투는 “핀란드의 모든 국민들은 어린 시절 적어도 한 번은 음악가가 될까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핀란드가 최근 클래식 강국으로 부상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자부심 넘치는 답변이었다. 핀란드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1인 1악기’ 정책의 수혜자가 된다. 원하는 악기를 선택해 전문 강사로부터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이 제도는 1960년대부터 핀란드 정부가 도입한 무상 음악교육 시스템이다. 이 제도 덕분에 재능 있는 유망주들이 일찍 발굴돼 최고의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들로 인해 비교적 변방의 핀란드가 클래식 음악계의 주류를 위협하게 됐다.

사실 영재 교육에 있어서 그 성과만은 한국도 핀란드에 뒤지지 않는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을 비롯해 반 클라이번 우승자 선우예권, 최근 여성 최초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종신악장으로 임명된 이지윤, 쾰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플루트 주자 조성현 등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휩쓸고 있다. 이들이 하루아침에 등장한 혜성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어린 시절 발탁돼 오랜 기간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성장한 재목들이다.

이처럼 문화 생태계를 유지하고 미래에도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영재 교육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내다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과정이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세계 문화정책의 중요한 이슈다. 앞의 음악가들을 키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기관을 둘 꼽는다면 하나는 2008년 개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이다. 여타 선진국에 비해, 심지어 1970년대부터 국가가 나서서 예술 영재 교육을 주도한 북한과 비교해도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지만 국내 최초의 국립 예술영재교육기관으로서 의미가 남다르다.

나머지 하나는 이보다 10년 일찍, 98년 금호영재콘서트 시리즈를 시작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다. 금호의 영재 지원이 작고한 박성용 전임 이사장의 사적인 음악 애호에서 비롯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가 무명의 영재 지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때만 해도 주변은 반신반의했다. 유명 예술가나 해외 오케스트라에 대한 단발성 후원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문화는 학문으로 치자면 기초과학이다. 기업 본연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당장 효과가 없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문화가 발달하면 이를 기반으로 사회 전반의 창의력이 높아지고 이는 경쟁력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박 이사장은 자신이 심어놓은 나무들이 온전히 열매를 맺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2005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부재와 더불어 영재 육성도 위축될 거라 우려했지만 의외로 그가 남겨둔 시스템은 탄탄했다. 학맥과 인맥을 배제한 객관적인 심사 제도로 검증된 인재들을 발굴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재능만을 보고 선발한 덕에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찾아왔다. 금호 영재 출신 콩쿠르 입상자들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부모가 평범한 교사나 회사원은 물론, 심지어 기초생활수급자도 있다. 이런 영재 지원 제도는 결과적으로 ‘부유층의 취미생활’이라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동안 1000명이 넘는 음악영재를 배출한 금호영재콘서트가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2005년 지휘자 로린 마젤은 “늘 든든하고 열정적인 예술 후원자였던 박 전 이사장은 수많은 영재 음악인들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문화예술이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에 대한 고인의 신념을 이제 그들이 수십 년에 걸쳐 세계무대에서 실천에 옮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독 작곡가 박영희는 최근 해외에서 높아진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체감하며 “외교관 100명이 못한 일을 조성진 혼자 해냈다”고 칭찬했다. 금호영재 1호인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최연소 국제 음악제 음악감독으로 임명돼 오늘 평창대관령 음악제를 개막한다. 거장의 예언은 이미 실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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