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유해 송환으로 6·12 정상회담 이행의 첫발을 뗀 미국과 북한이 이번 주 싱가포르에서 비핵화 협상을 재개할 전망이다. 대화 무대는 남·북·미·중의 외교장관이 한자리에 모이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다. ARF를 계기로 한 남북, 북·미, 남·북·미 간 연쇄 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질지 주목된다.
북한이 지난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에 맞춰 6·25전쟁 때 숨진 미군 유해를 송환한 이후 북·미 간에는 일단 유화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북한대사관 정문 옆 대형 게시판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사진이 걸린 건 상징적인 변화다. 이 게시판에는 최근까지 김 위원장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사진만 걸려 있었다.
미 정부 내에선 비핵화 협상에 참여하는 당국자들에게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 표현을 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29일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이같이 전하면서 “CVID 용어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북한을 배려한 조치”라고 해석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 유해 송환 직후 김 위원장에게 고맙다는 내용의 트윗을 날렸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추가 유해 발굴을 위해 미군 인력을 북한에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제 남은 건 본게임인 비핵화 협상이다. 북한은 평북 동창리 서해미사일발사장 일부 시설과 평양 인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조립시설을 해체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종전선언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은 다음 달 1일 시작하는 ARF 계기 각종 회담에서도 이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5∼6개국과 양자 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남북 외교장관 회담은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북한을 포함해 15개국과 양자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RF 때는 만찬장 대기실에서 조우해 3분간 대화한 게 전부였지만 올해는 회담 기회를 십분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 외교장관 회담은 2007년 송민순 장관과 박의춘 외무상이 마지막이었다.
남북을 넘어 북·미, 남·북·미 간 외교장관 회담이 성사되면 비핵화 조치와 종전선언을 맞교환하는 문제도 논의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종전선언의 시기와 주체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이뤄지면 9월 하순 유엔총회에서 남·북·미 정상이 만나 종전선언을 하는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폼페이오 장관과 이 외무상 간 회담이 성사되면 북·미 외교 당국 간 공식 채널이 만들어지는 의미도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직은 ARF 때 종전선언을 논의할 특별한 일정이 정해진 건 없다”고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다.
미 정부 내에선 종전선언에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유해 송환으로 성의를 보였지만 정작 비핵화 측면에선 별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미 정부는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 6∼7일 3차 방북 때 북측에 요구한 핵시설 리스트와 비핵화 시간표 제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북한은 유해 송환 뒤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이제는 미국이 화답할 차례’라는 은근한 압박 메시지로 해석된다.
권지혜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