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인근 ‘샤로수길’은 원래 학생과 직장인이 끼니를 해결하는 골목시장이었다. 행정구역상 정식 명칭은 ‘서울 관악구 관악로 14길’. 길이 600m에 폭이 겨우 8m로 좁은 일방통행 골목이다. 분식집, 반찬가게, 슈퍼마켓이 줄지어 있던 곳이다.
2010년 어느 날, 평범했던 이 골목으로 한 수제버거집이 호기롭게 들어와 깃발을 꽂았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에 희망을 본 젊은 창업자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특색 있는 식당과 카페가 속속 들어섰다. 그렇게 명소가 됐다. 서울대를 상징하는 ‘샤’ 모양의 정문 조형물과 강남구 ‘가로수길’의 이름을 조합한 샤로수길이라는 별칭도 생겼다. 침략일까 개척일까. 어떻든 골목은 허름한 시장의 태를 빠르게 벗어갔다.
뺏고 뺏기는 ‘땅따먹기’
서울 낮 최고기온이 34도였던 지난달 25일 찾은 샤로수길에는 골목 양옆으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골목 초입 흰색 야외테이블을 둔 디저트 카페가 눈길을 끌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400m쯤 걷자 분홍색 페인트로 벽을 칠한 프랑스 가정식 음식점이 나왔다. 예쁘게 꾸민 점포 사이사이 오래된 신발가게나 정육점을 봤던 터라 조금은 낯설었다. 어릴 적 자주 가던 분식집을 닮은 점포에 반가움도 잠시, 몇 걸음만 옮기면 세련된 식당이 나온다. 옛 골목 분위기를 희미하게나마 간직한 곳이었다.
‘서울대입구역 편백숲1차 지역주택조합 추진위원회’ 사무실은 그 골목 끝에서 약 100m 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10년쯤 전부터 이 일대의 아파트 단지 건축을 추진해 왔다. 주민 투자금을 모아 건물을 지으려 했지만 갑작스레 샤로수길이 조성되면서 임대료가 치솟았다. 속이 타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정한 사업구역에 들어와 신축 건물을 짓는 건축업자는 침략자에 불과했다.
건축업자들은 억울하다. 합법적인 절차로 상가 건물을 짓고 있는데 추진위 측이 민원·집회 등의 방법으로 공사를 지연시켜 손해가 발생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미 상권이 활성화되고 신축 건물이 많이 들어선 골목 특성상 아파트 단지 건설 허가가 나는 것은 어렵다고 봤다. 또 자신들은 외지인이 아니라 이 지역에 오래 거주했던 주민이라고 주장했다.
상권이 형성되고 수요가 생겼다. 이득을 보려는 자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시장의 법칙이다. 차지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땅따먹기’. 잠깐 눈만 깜빡여도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된다. 승리하거나 패하거나 함께 몰락하거나. 이들이 택한 건 ‘상생’이 아닌 ‘전쟁’이다.
차지하려는 자 ‘건축업자’
직장을 그만두고 10년간 건축업에 몸담아온 서모씨는 봉천동을 비롯한 관악구 일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4월 말부터 최근까지 추진위와 한 차례 전투를 치렀다. 추진위 측이 서씨 소유의 다가구주택 주차장에 차량 2대를 무단으로 들여놓은 게 발단이 됐다. 서씨는 “경찰에 전화했더니 사유지에 주차된 차를 견인할 수 없다고 했다”면서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무단방치된 차량의 경우 민원이 접수되고 관할구청 직원의 현장조사가 끝나면 자진이동계고 기간에 들어간다. 계고 기간은 법적기준이 없기 때문에 자치구별로 달라진다. 관악구청 교통행정과 관계자는 “사유지의 경우 3주에서 한 달 정도의 기간을 준다”고 말했다.
서씨는 “추진위 측이 기간 만료 전에 원래 있던 차량을 다른 외제차로 몰래 바꿔 주차했다”면서 “그렇게 견인 불가 기간이 한 달 더 연장됐다”고 말했다. 분노한 서씨는 결국 차량을 비계(건설현장에서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철제 가설물)로 둘러싸 교체할 수 없게 막았다. 차를 빼기 위해 연락하면 비계를 철거하겠다는 메모도 붙였다.
길었던 소모전은 결국 6월 초 경찰 입회하에 마무리됐다. 서씨는 “추진위 측이 먼지·소음·교통 불편 초래 등을 이유로 구청에 민원도 넣어 공사를 방해하고 있다”며 “현장에서 시위를 한 적도 있다. 이들의 방해로 완공이 미뤄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손해”라고 토로했다. 그는 “사업구역에 신축 건물이 생기면 조합은 전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서 “싼값에 건물을 매입해 사업을 추진하려고 동네를 계속 낙후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건축업자 박모씨는 “(구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은 추진위에서 조합원을 계속 모집하는 게 문제”라며 “상권이 이렇게 활성화된 지역을 사업대상지로 임의 설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건축업자들은 ‘추진위가 지역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취지의 진정서를 관악구청에 냈다.
막으려는 자 ‘추진위’
추진위는 2009년 11월 결성됐다. 관악구 일대가 2000년대 초반 정비예정구역으로 지정되면서였다. 주민들에게 ‘지역 재개발’은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였다. 김영환(50) 추진위원장 주도로 조합원들이 모였다. 이들이 아파트 단지 사업구역으로 구상하고 있는 곳은 봉천동 1610∼1630번지 일대다. 그러나 관악구청은 2014년 주민 과반의 동의를 얻어 이 일대의 정비예정구역을 해제했다. 김 위원장은 “우선 구청으로부터 조합 인가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씨의 공사를 무단주차로 방해했던 외제차는 김 위원장 지인의 것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김 위원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곳으로 몰려들어 조합원의 피 같은 돈을 빼내려는 건축업자를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건축업자들의 ‘땅 투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건축업자들이 이 일대의 일부 부지를 매입한 뒤 추진위에 비싼 값으로 팔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합원들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야 하는데 업자들이 이런 식으로 부당이익을 취하니 힘들다”고 호소했다.
김 위원장은 “골목에 1층짜리 점포 몇 개가 들어온다고 상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이태원 경리단길은 2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상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상권이 활성화된 것이다. 하지만 샤로수길은 폭이 8m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건축업자들이 신축 건물을 다중주택으로 신고한 뒤 불법으로 개조해 원룸처럼 전월세를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합원은 1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역 주민도 있지만 절반가량은 투자 목적으로 들어왔다. 가입비는 1인당 3500만원. 400억원 정도의 사업추진비용이 모였다.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않으면 1000만원만 돌려받게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김 위원장은 “분양 수수료 등 필수적으로 필요한 금액을 제외한 전액을 조합원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해명했다.
구청 관계자는 “조합으로 승인 받으려면 추진위가 계획한 아파트 세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조합원을 모으고 해당 구역 토지 사용권한의 80%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며 “아직 조합 신고가 들어온 적은 없다”고 말했다.
추진위는 지난 20일 관악구청 앞에서 건축업자들의 건물 신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거리 곳곳에 업자들을 규탄하는 현수막도 걸었다. 지금도 이 현수막은 프랑스 가정식 집 인근 공사현장에 걸려 있다. 이들이 택한 건 상생이 아닌 전쟁. 이권이 걸린 이상 자비란 없다. 2030세대가 찾아와 사랑을 나누고 분위기에 취해 젊음을 즐기는 이곳. 여기 샤로수길은 전쟁터다.
전쟁 끝내려면… “지자체가 나서야”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연남동 연트럴파크, 망원동 망리단길처럼 떠오르는 상권마다 유행처럼 별칭이 붙고 있다. 저렴한 임대료는 분위기 있는 식당과 카페의 젊은 창업주를 불러들인다. 거리가 아름답게 조성되면 그럴싸한 이름이 따라온다. 이 이름을 쫓아 사람이 몰리고 상권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임대료가 오른다. 이때부터 복잡한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외지인이 임대료를 올려 원주민을 몰아내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정도로 설명되는 문제가 아니다. 분쟁 구도가 원주민·외지인 간이 아니라 샤로수길처럼 건축업자·지역주택조합으로 묶이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서울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한 대도시에서 당사자 간 합의점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더리서치그룹 부동산조사연구소 김학렬 소장은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는 것도 해결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박은주 박태환 이재빈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