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대,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는 거의 반드시 랜드마크(landmark·해당 장소와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가 등장한다. 20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국과 아시아·중동 주요 도시의 상징으로는 초고층 건물이 빠지지 않는다.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세계무역센터(WTC),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 중국 상하이타워…. 이렇게 하늘 높이 솟은 건물은 경제력과 첨단 기술로 이룬 성취라는 점에서 자랑거리가 된다.
초고층 건물은 단순히 과시용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 많고 땅값 비싼 도시의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법(건물주로서는 제한된 공간에 되도록 많은 사람을 수용해 돈을 버는 수익성 제고 수단)이자 도시 경관과 분위기를 바꾼다는 점에서 거대한 설치작품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828m 높이의 부르즈칼리파이지만 3년 후엔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타워에 1위 자리를 내줘야 한다. 제다타워 높이는 1000m가 조금 넘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질 없이 세워진다면 인류 최초의 1㎞대 건축물로 기록된다.
미국에서 재현된 바벨탑의 꿈
하늘에 도달하듯 높이 오르고 싶은 인류의 욕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하늘 높이 올라가 신과 동등해지자는 생각으로 바벨탑을 짓다가 신으로부터 언어가 여러 개 갈라지는 벌을 받고 각지로 흩어졌다는 내용이다. 바벨탑은 기원전 3000∼4000년 지금의 이라크 남부 바빌로니아 지역에 세워졌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이 지역은 인류 최초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청으로 벽돌을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이 높이 90m 정도의 사각뿔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 피라미드는 실제로 그런 모습을 한 건축물이다. 피라미드는 지금 보더라도 웅장한 규모다. 대표적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7m로 약 50층짜리 빌딩 높이와 맞먹는다. 높이 100m에 도전한 고층빌딩 메소닉템플(92m)이 미국 시카고에 세워진 게 1892년이다.
초고층 건축 붐은 19세기 말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건물 1만7500채와 주택 7만여채가 불타는 등 도시가 전소되다시피 한 1871년 10월 8일 대화재가 계기였다. 도시 재건을 위해 건축가들이 몰려들었고, 시카고는 첨단 기술을 동원한 고층 건축의 경연장이 됐다. 건축가들은 새 건물을 지으면서 철골 구조를 사용하고 외벽은 넓은 유리창으로 덮었다. 주요 건축재료를 돌에서 철로 바꾸면서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마천루의 아버지로 불리는 기술자 출신 건축가 윌리엄 르 배런 제니가 1885년 홈인슈어런스빌딩(55m·12층)을 세우면서 처음으로 이런 구조를 도입했고 여러 건축가가 이를 따랐다. ‘마천루’로 번역하는 ‘skyscraper’라는 말은 홈인슈어런스빌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홈인슈어런스빌딩과 메소닉템플은 각각 1931년, 1939년에 허물어졌다.
이후 초고층 건축을 주도한 도시는 뉴욕이다. 처음으로 200m를 넘긴 1909년 메트로폴리탄라이프타워(213.4m)를 시작으로 1913년 울워스빌딩(241.4m), 1930년 크라이슬러빌딩(318.9m), 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381m), 1972년 구(舊) 제1세계무역센터(417m)까지 60년 넘게 세계 최고층 기록을 뉴욕이 혼자 갈아치웠다. 이런 세계기록 독주에 처음 제동을 건 초고층 건물이 1974년 시카고에 세워진 442.1m 높이의 윌리스타워다. 원래 시어스타워로 불렸던 이 건물은 1998년 451.9m를 찍은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트윈타워가 완공될 때까지 20여년간 세계 최고층 지위를 유지했다. 윌리스타워는 일정한 길이의 직육면체(단면이 정사각형인 튜브) 9개를 블록처럼 붙이며 쌓아올린 형태다. 당초 건축가 파즐러 칸은 담배 다발 속에서 몇 개비만 위로 솟은 모습으로 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동양으로 넘어간 초고층 주도권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세워진 페트로나스트윈타워는 88층짜리 쌍둥이 빌딩이다. 미국이 독점해온 세계 최고층 타이틀을 처음으로 빼앗아 온 건물이다. 미국은 이후 다시는 타이틀을 되찾지 못했고 초고층 건축의 주도권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오다시피 했다. 페트로나스트윈타워는 이슬람식 기하학 문양과 말레이시아 전통 계단형 외관을 갖춰 동양 건축물의 개성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건물은 170m 높이에서 공중다리로 연결된다.
페트로나스트윈타워를 2위로 밀어낸 건물은 2004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나왔다.
101층, 508m 높이인 타이베이101은 모양과 크기가 같은 사각형 바구니 8개를 쌓아올린 모양으로 중국식 탑을 닮았다. 이 건물은 설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당 16.8m 속도의 엘리베이터로도 주목 받았다. 대만은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인 데다 지진이 잦은 탓에 타이베이101은 수평으로 받는 외부 압력에 더욱 신경써야 했다. 공사 과정에서는 규모 6.8 지진으로 크레인 2대가 무너지고 5명이 숨지기도 했다. 시공사는 지름 6m, 무게 660t짜리 강철공을 92층 내부 로프에 매달아 87∼88층까지 늘어뜨려 진동을 흡수하는 역할을 맡겼다.
타이베이101의 기록을 깨고 현재까지 세계 최고층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는 중동에서 일고 있는 초고층 건축 열풍을 대변한다. 개장 전까지 ‘버즈 두바이’로 불린 이 건물의 당초 설계안은 타이베이101보다 약 10m 높은 수준이었는데 공사가 끝났을 때는 320m가 높았다. 부르즈칼리파는 초고층을 넘어 극초고층 시대를 연 건물로 평가된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통상 초고층은 높이가 200m나 300m 이상, 극초고층은 600m 이상인 경우를 말한다. 부르즈칼리파가 800m를 훌쩍 넘기면서 이제는 600m, 700m짜리 건물도 세계 최고층이라는 기록을 얻을 수 없게 됐다. 현재 건축 중인 빌딩 가운데 부르즈칼리파를 능가할 건물은 제다타워뿐이다. 2013년 착공한 이 건물은 167층에 1000m를 넘길 것으로 소개되는데 정확한 높이는 완공 후에나 알 수 있을 듯하다.
중국은 부르즈칼리파 등장 탓에 세계 최고층 기록을 차지한 적이 없지만 가장 많은 초고층 최상위권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2021년까지 완공 예정인 300m 이상 건물은 전 세계에 151채인데 그중 58.9%인 89채가 중국에 지어진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상하이타워는 632m로 세계 2위 초고층 건물이다. 전망대는 562.1m로 세계에서 제일 높다. 부루즈칼리파 전망대는 555.7m다. 엘리베이터가 초당 20.5m 속도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건물이기도 하다. 부르즈칼리파의 2배 속도다. 상하이타워는 9개 원통형 공간을 겹겹이 쌓은 형태인데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360도 가까이 비틀며 올라간다. 비상하는 용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시공 주도하지만 기술은 빈약한 한국
2017년 완공한 롯데월드타워는 세계 초고층 최상위권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국내 건축물이다. 554.5m, 123층 높이로 세계 5위인데 제다타워를 비롯한 각 초고층 건물의 등장과 함께 빠른 속도로 순위가 내려갈 예정이다. 종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2011년 인천 송도에 세워진 동북아무역센터(305m)였다. 롯데월드타워는 이보다 250m 높다. 전망대는 497.6m로 유리바닥 전망대로는 세계 최고 높이다.
한국은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와 잠실 롯데월드타워, 부산 해운대 아이파크와 위브더제니스타워 등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초고층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40층 이상 주거 건축물 수는 중국 미국 UAE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인데 국가 면적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순위다. 한국에 본격적인 초고층 건축 시대를 연 건물은 1985년 세워진 여의도 63빌딩(현 63스퀘어)이다. 그 전까지는 1971년 세워진 서울 종로구 관철동 31빌딩(110m)이 가장 높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서울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고 경기도 동탄과 광교신도시, 송도 국제업무지구, 부산 해운대신도시가 조성됐다.
빈약한 핵심 원천기술 수준은 한국 건축의 최대 약점으로 지목된다. 한국 기업은 부르즈칼리파를 비롯해 세계 각국 초고층 건설에 참여했지만 시공 분야에 집중하는 탓에 수익률이 낮은 편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초고층 설계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큰 약점”이라며 “시장 선점을 위해서는 핵심 기술 확보에 더욱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