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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다양한 키워드 그물로 ‘유럽의 실체’를 건지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프랑스 축구대표팀이 지난달 16일(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러시아월드컵은 유럽이 축구의 대륙이라는 걸 방증한 이벤트였다. 8강 진출팀 가운데 6팀이 유럽 국가였다. 조홍식 교수는 유럽 문명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축구를 꼽았다. 현재 유럽에서 축구선수로 ‘등록’해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2100만명(전체 인구의 2.48%)에 달한다고 한다. AP뉴시스




시작부터 엉뚱한 질문이 등장한다. 도대체 유럽이란 무엇인가. 너무 간단해서 생뚱맞게 여겨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아시아의 서쪽에, 아프리카의 북쪽에 있는 대륙이라고 말하는 건 명쾌한 답변일 수 없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외계인이 바다와 육지가 표시된 지구의 지도를 보고 판단한다면 유럽을 대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지리가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유럽연합이 곧 유럽이라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유럽연합=유럽’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유럽연합에는 스위스나 노르웨이 같은 국가가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영국마저도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상태다.

‘문명의 그물’은 도입부에 등장하는 유럽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보고서다. 저자는 유럽의 문명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답변을 갈음한다.

저자인 조홍식은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그는 언어 종교 대학 도시 자본 같은 키워드를 바늘과 실처럼 사용해 각각의 그물을 짠다. 그리고 이들 그물을 포개 그물코가 촘촘한 거대한 대형 그물을 만든 뒤 장구한 역사의 바다에 던져 유럽의 실체를 건져 올린다.

핵심은 유럽 문명이 무엇인지 전하는 대목이다. 동아시아가 중국이라는 ‘1강’이 독주한 지역이었다면 유럽은 다원성을 바탕으로 국가들이 이웃 나라를 견제하고 경쟁하고 모방한 대륙이었다. “문명의 결정체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언어를 보자. 유럽연합에는 무려 24개의 공식 언어가 존재한다. 이건 곧 모든 법안이나 보고서가 24개 언어로 번역돼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언어가 다르다는 게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진 않는다. 서로 비슷한 구조를 띤 언어가 많고, 그래서 여러 개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적지 않다. 저자는 유럽 언어의 세계를 개괄한 뒤 이렇게 적었다. “(유럽 국가들은) 알파벳이라는 같은 문자를 바탕으로 수천 년 동안 교류하면서 하나의 문화 토양을 공유해왔다. 통합과 다양성의 조화라는 유럽 문명의 특징을 언어와 문자에서부터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가 사용한 그물 중 하나가 축구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축구의 역사를 면밀히 살피면서 축구라는 스포츠에 내재된 근대성을 통해 유럽 문명의 성격을 드러낸다. “축구를 통해 유럽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썼는데, 누구나 수긍할 만한 주장일 것이다.

눈길을 끄는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은 해결이 난망한 과제일 거라고, 그 이유는 여론의 분열 탓이라고. 저자도 여기에 주목하면서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토론의 장이 형성돼야 한다고 썼다.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미디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통합된 방송과 연결된 언론을 통해 (유럽에) 여론의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민주주의 수준 역시 한 단계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면서 “이 실험의 성패는 유럽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미래”라고 적었다.

책의 만듦새도 훌륭하다. 곳곳에 등장하는 지도와 사진과 그림은 가독성을 배가시킨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유럽 국가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평화적 통합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우직하게 걸어가고 있음을 강조한 뒤 이렇게 말한다.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협력을 동반해야 비로소 인류가 오랫동안 이룩해온 발전의 혜택을 골고루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유럽이 다양한 문명의 그물을 운영하면서 도달한 결론이며, 이것이야말로 유럽의 그물이 세계의 그물에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교훈이다.”

저자는 특이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중학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다녔고 프랑스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1993년 한국에 들어와서는 중앙일보 기자와 세종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국민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있다.

과거 기자로 활동하며 쌓은 내공 덕분일까. 사례를 그러모아 핵심을 길어 올리는 솜씨는 저널리스트의 글을 보는 듯하다. 저자는 “인문·사회과학은 이야기를 통해 존재한다”고 적었고, 스스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집필 스타일”을 갖췄다고 자평했다. 책을 읽으면 저자가 얘기하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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