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간 신약학계, 특히 바울신학 분야 연구자들에게 필독서로 꼽힌 책이 있다. 1977년 당시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 EP 샌더스 교수가 발표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다. 샌더스 교수는 BC 200∼AD 200년의 유대교 관련 1차 문헌을 샅샅이 검토한 뒤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바라보던 기존의 관점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제임스 던 영국 더럼대 교수, 신약학자 톰 라이트를 통해 바울에 대한 이른바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이 확립됐다.
국내에서도 이 책을 전후로 바울신학 연구가 달라졌다는 평가에 이의를 다는 이는 없다. 신약학계의 판을 뒤집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한국어판 번역 출간은 이뤄지지 않았다. 번역하기 어렵고 책을 사볼 만한 사람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장성이 없다 보니 오히려 기피대상 1호로 꼽혔다.
바로 그 문제의 책이 지난 6월 30일 한국어판으로 첫선을 보였다. 아시아권에선 최초이고 독일어 이탈리아어에 이어 세 번째 외국어 번역본이다. 40년 넘게 걸린 시간만큼 출판 과정도 평범치 않았다. 책을 번역해 내놓은 박규태 번역가와 맹호성 ‘알맹e’ 이사를 지난달 24일 서울 성북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알맹e’는 1991년 ‘한국 크리스챤 문서선교재단’에서 출발한 출판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가 전자책을 염두에 두고 만든 출판사다. 맹 이사는 십수 년간 수차례 이 책의 번역을 권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종이책 출간을 결심했다. 장신대 신대원을 거쳐 미국 매코믹신학교,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신약학을 전공했던 그는 “바울의 ‘새 관점’을 말하면서도 정작 시조가 된 책은 읽지 않고 논하는 풍토가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는 “아내 김진실 알맹2 대표와 대화하다가 ‘지난 20년간 저작권 중개를 해오면서 감사한 일이 많았는데 사회에 보답한다면 이 책을 번역 출간하는 게 어떨까’ 생각해 출판을 결정했다”고 했다.
책으로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적자를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차적으로는 번역이 가장 문제였다. 샌더스 교수는 책에서 탄나임 문헌, 사해사본, 외경과 위경에서 고른 집회서와 에녹1서, 희년서, 솔로몬의 시편, 에스라4서를 통해 드러나는 방대한 종교 패턴을 분석한다. 이를 토대로 유대교를,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파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규정하고 바울 신학을 새로이 정립해 나간다.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면 쉽게 나설 수 없는 일이었다.
2015년 12월 맹 이사는 박 번역가를 찾아가 업계 최고의 예우를 갖춰 번역을 제안했다. 2002년 12월 책의 유명세를 듣고 원서를 읽다 포기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지만 박 번역가는 수락했다. 출판계에서는 ‘신학 덕후’로서 열정과 끈기, 실력을 갖춘 박규태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번역가는 1년 넘게 꼼꼼하고 치열한 독서를 하면서 번역가 김석희의 표현처럼 “장미 밭에서 춤추는”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맹 이사가 직접 내지 디자인을 했다. 이민연 디자이너와 김지호 도서출판100 대표와 고신대 신대원생 하늘샘, 김도완 비아토르 대표가 디자인과 편집, 제작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완성된 책은 1판 PDF 전자책과 종이책 버전으로 동시에 세상에 나왔다.
유통 과정도 남다르다. 처음 종이책을 낸 출판사답지 않게 온라인서점의 할인이나 반품 요구를 거절하고 알맹e 웹사이트(rmaenge.com)를 통해 직거래한다. 전자책 3만3000원, 종이책 9만8000원에 판매하는데 종이책 600권 중 290여권이 남았다.
맹 이사는 책의 중요성과 가치를 고려해 전자책 제작을 결정하고 지난해 9월 시험판인 0판 PDF를 먼저 선보였다. 그는 특히 “학생들이 전자책을 불법 공유하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 바란다”며 정식 구매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PDF판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뒤늦게나마 책이 번역돼 나온 것을 반기고 있다. 박영호 한일장신대 교수는 “그동안 새 관점과 관련해 지엽적인 문제가 침소봉대되거나 논의 자체가 왜곡된 경우가 적잖았다”면서 “지금이라도 이 책을 번역해 내놓은 두 사람의 헌신이 매우 귀하다”고 말했다. 신학교 도서관들이 책을 구비해서 학생들이 관련 연구에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향후 이 책이 바울의 새 관점과 관련해 한국 신학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박 번역가는 “오랜 세월 축적된 연구 성과를 쏟아내는 서구 신학계의 토양과 달리 국내에선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도 이토록 어렵다”며 “40여년 만에 번역·출간됐지만 이 책이 우리 심상으로 바울을 들여다보고 우리말로 사유해서 우리 나름대로 바울 신학을 세워가는 일에 자그마한 기여라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