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판문점·센토사 선언의 역습



종전선언 논란 뜨겁지만 정작 핵심 목표인 북한 비핵화는 지지부진
성급한 정상 간 합의가 주요한 원인… 시간 갖고 돌파구 마련해야


불볕더위가 한창인 요즘 남·북·미·중 사이에서는 종전선언 논란이 뜨겁다. 미국은 북한의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종전선언이 가능하다고 밝히는 반면 북한과 중국은 이른 시일 내 종전선언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우리나라에도 종전선언 채택에 적극 나서라고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한·미 공조의 틈새가 생겨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나라를 꽉 붙잡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중이다.

접점을 마련해야 하는데, 자존심 싸움의 성격마저 가미돼 여의치가 않다. 운전자를 자임하는 문 대통령이 다시 중재 채비를 하는 듯하다. 당연한 일이다. 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고, 한반도 평화의 기운이 소멸되면 우리나라가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 남북 정상회담’ 8월 개최설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조기 방북설이 솔솔 나오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종전선언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걸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다. 북한 비핵화라는 핵심 의제가 종전선언에 밀려버린 형국인 탓이다.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열린 건 두 말할 나위 없이 북핵이라는 위중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북한이 오래전부터 줄곧 요구해온 종전선언 추진 문제가 슬그머니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정작 북한 비핵화는 지지부진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남북 정상의 판문점선언과 북·미 정상의 센토사 공동선언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판문점선언이 한반도 정세를 전쟁 위기에서 평화로 전환시킨 건 분명하다. 다방면에 걸친 남북 교류도 활성화됐다. 그러나 선언에 담긴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항목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종전선언 시기를 비롯해 평화체제 구축 방법이 꽤 구체적으로 명시된 셈이다. 그러나 비핵화 관련 내용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수준이다. 비핵화 주체도 모호하고, 시기도 분명치 않다. 북한 비핵화보다 종전선언에 더 무게가 실렸다고 할 수 있다.

북·미 정상의 6·12 선언은 어설프다. 1항과 2항이 ‘새로운 북·미관계를 수립하기로 약속한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에 동참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3항에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완성을 향해 정진해 나갈 것임을 약속한다’고 적었다. ‘새로운 북·미관계’와 ‘평화체제’가 비핵화보다 앞서 있다. 비핵화 이행 일정표가 없기는 판문점선언과 마찬가지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계속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김정은은 여세를 몰아 두 선언문을 대남, 대미 압박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선언문을 봐라. 올해 종전을 선언한다고 하지 않았나. 새로운 북·미관계를 정립한다고 약속했으니 종전선언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대놓고 말만 안 했지, 비핵화 조치는 종전선언 이후에 한다는 게 정상 간 합의라고 우겨대는 모양새다. 물론 문재인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해석은 다르다. 활자화가 안 됐을 뿐 김정은이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결국 비핵화가 난관에 봉착한 데에는 정상 간의 ‘성급한’ 합의가 한몫했다고 하겠다.

비핵화의 중간성적을 굳이 매기자면 C 정도일 것이다. 최근에도 북한이 핵활동을 계속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겠어?’라는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

‘핵 있는 평화’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비핵화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묘책이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이 종전선언에 앞서 핵시설 리스트를 제출하는 등 전향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려면 강력한 대북 제재를 유지해야 하는데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 흐름으로 가고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다. 김정은은 두 정상회담을 통해 확보한 유리한 고지에 서서 비핵화에 앞선 종전선언을 고집하고 있다. 폭염의 기세는 이달 중순쯤 꺾이겠지만 지루한 비핵화 공방은 그 이후까지 뜨겁게 이어질 것 같다.

편집인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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