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소식에 울분을 참지 못해 그렸다는 ‘다색’ 2점 첫 공개

윤형근은 반골 기질이 강했다. 서울대 미대 1회 입학생이던 시절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되기도 했다. 그의 홍대 편입을 끌어준 이가 당시 홍대 교수였던 김환기였다. 1974년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5·18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울분에 차서 그린 ‘다색’(1980년, 마포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청다색’(1976∼77년작, 면포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때론 전시장의 아카이브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하기도 한다. 1974년 10월의 어느 날, 서울 신촌의 작업실. 벽면 왼쪽에 김환기의 전면 점화가 걸렸다. 오른쪽엔 크기는 작지만 자신이 막 시작한 ‘천지문(天地門)’ 작품을 걸었다. 도전장을 내밀 듯. 두 그림을 배경에 두고 카메라 앞에 선 이 남자는 당시 46세의 화가 윤형근(1928∼2007)이다. 존경했지만 넘어야 할 벽이었던 대학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1913∼1974)의 자장(磁場)을 벗어난 순간을 그는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단색화의 거목으로 불리는 ‘윤형근 회고전’이 최근 개막됐다. 미공개작을 포함한 작품 40여점, 드로잉 40여점, 아카이브 자료 100여점이 나왔다. 화업 초기인 60년대∼73년까지의 소품들도 처음 공개됐는데, 청색 톤의 서정적 추상화에서 김환기의 대표 브랜드인 청색 점화의 영향이 깊이 감지된다.

73년의 이른바 ‘숙명여고 사건’은 그랬던 작품 세계에 일대 분수령이 된다. 미대를 졸업하고 이 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던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가 연관된 권력형 입학 비리 사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고, 며칠 뒤 반공법 위반이라는 혐의가 씌워진 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다. 이후 84년 경원대 교수로 초빙되기까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10여년간 변변한 직장도 없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전업작가로 살아야 했던 이 시기에 그는 가장 왕성하게 작업을 하며, 자신의 ‘블루엄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환기 블루’를 연상시키는 하늘의 색에 땅의 빛깔인 엄버(Umber·암갈색)를 섞으면 나오는 ‘오묘한 검은색’을 가지고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특히 그는 천에 젯소(흰색 성분)를 바르는 일반 캔버스가 아닌, 날 것의 천을 사용했다.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천은 마치 누런 대지처럼 보이고, 검은 색칠을 한 넓은 면은 거석을 우뚝 세운 것 같은 효과를 낸다. 작가는 이를 ‘천지문’이라고 명명했다.

80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김환기의 작품 세계와 관련해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니는 그림”이라고 평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선 “잔소리를 싹 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드러난 형상만 보고 윤형근을 단색화 작가로 취급하는 미술계의 시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단색화는 70년대 박서보, 하종현 등 미술계 주류 엘리트들이 중간색의 단색을 사용해 제작했던 작품 경향을 일컫는 용어다. 이들의 작업은 조선의 도공이 물레질하듯 무심(無心)의 경지로 해석이 되곤 했다. 하지만 윤형근의 삶은 시대의 아픔이 처절하게 녹아 있고 회화는 외마디 비명 같은 저항의 표현이었다.

“남산(중앙정보부 별칭)을 다녀온 사람”이라며 기피 대상이 될 때도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후배인 최종태(86) 조각가는 8일 “작업실에 놀러 가면 시커멓게 될 때까지 죽죽 계속 칠했다. 화가 나서 그렇게 그린다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윤형근의 작품 세계는 삶과 유리된 무심의 단색화가 아니다. 내면의 감정과 사상을 표출한 표현주의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에는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전해 듣곤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렸다는 ‘다색’ 시리즈 2점도 처음 공개됐다. 유독 이 작품들에서만 검은 기둥들이 기울어져 있어 서로 기댄 채 쓰러진 광주의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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