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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그녀는 요트를 타고 왜 태평양을 건넜나

지난해 태평양 항해에 나섰던 임수민씨가 기착지 중 한 곳인 작은 섬나라 투발루에서 찍은 기념사진. 임씨는 항해가 끝난 뒤 기업들로부터 후원금을 모금해 최근 자신의 요트를 장만했다. 또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다. 아래 지도는 지난해 임씨가 태평양을 항해한 경로. 미메시스 제공






20대 여성이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고 하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성은 왜 이런 위험천만한 도전에 나섰던 것일까. 책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로 꽉 차서 마음과 머리가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궁금한 건 저런 고민과 희망을 품다가 왜 하필 바다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 했느냐는 것이다. 책을 다 읽은 뒤 저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어른이 됐다고 여겼지만 저는 미숙한 인간이었어요. 사람들한테서 받는 실망감이 컸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요. 어차피 힘들 바에는 누구나 버거워할 만한 것들로 힘들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때마침 파나마에서 배를 구입한 누군가가 그 배를 몰고 부산까지 항해를 한다고, 배에 동승할 일반인을 모집한다고 하더라고요. 곧바로 지원했죠.”

자, 그렇다면 이토록 대찬 모험에 나선 주인공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책을 펴낸 임수민(26)씨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기업 취업을 꿈꾸던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만원 지하철 안에 구겨져서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던 임씨의 기분은 까라져 있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는데 마침 자신의 앞에 빈자리가 났다. 그런데 느닷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임씨는 이렇게 썼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게 일어난 일 중 고작 내 앞사람이 내가 원할 때 딱 맞춰 자리를 비운 그 우연이 한창나이인 내 일상 중 가장 행복한 때라니. …나는 와장창 부서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 맺혔다.”

가출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고민 끝에 교환학생 제도를 활용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외국에 가서는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도시 사람들의 온기를 흑백사진에 담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의 항해 일지를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항해가 시작된 건 지난해 3월이었다. 파나마에서 출발한 배는 두 척이었고 탑승한 인원은 총 8명이었다. 항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엔진이 고장 나 고생해야 했고, 바다 한가운데 정박했을 땐 수영을 즐기다가 해파리에 쏘이기도 했다. 임씨는 홍일점이었기에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구박을 받을 때도 적지 않았다.

물론 낭만적인 순간을 마주한 적도 많았다. 배에서는 매일 밤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야 했다. 한밤중에도 누군가는 배를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살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불침번을 서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심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한복판에서 “세상이 아침을 맞는 모습”, 그러니까 일출을 마주했을 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달콤한 색에 흥분되어 입이 딱 벌어진 사이 서서히 구름들은 주황색으로 바뀌어갔다. …순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이런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면 아무리 좁쌀만한 존재가 되더라도 살아있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책에는 배 위에서 적은 일기와, 부모와 지인들에게 띄운 부치지 못한 편지도 한가득 실려 있다. 특히 저자가 그때그때의 일상을 써 내려간 일기는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비가 오면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반가워한다. 샤워를 할 기회다. 빨래를 할 수 있다. 비를 맞는 게 이렇게 좋다니. 태평양의 비는 미끈미끈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바닷바람도 냄새가 없다. 비린내가 진동할 것 같았는데 태평양은 아무런 향이 없다.”

“태평양의 수평선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주변을 전반적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가 어항 속에 놓인 물고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항해는 부산에 도착한 그해 8월까지 5개월 동안 이어졌다. 그렇다면 태평양을 건넌 뒤 임씨는 무엇을 얻었을까. 그는 스스로를 “실패한 모험가”라고 규정했다. 기대와 달리 강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만 재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한 모험가”라는 자책은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책의 끄트머리엔 기착지 중 한 곳인 일본 나가사키에서 임씨가 한 재일교포 3세와 주고받은 얘기가 등장한다.

“태평양에선 무엇을 얻었습니까?”

“보름달을 실컷 보고 왔어요. 보름달이 사라졌을 때는 달이 얼마나 밝은지 깨달았고, 보름달이 떴을 때는 밤하늘이 얼마나 어두운지 깨달았어요.”

우리는 달이 얼마나 밝은지, 밤하늘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있을까. 임씨는 이런 사실을 체감한 사람이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모험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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