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하고많은 말 중에 그는 왜 ‘행복’을 말하고 싶었을까

박이소 작가가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1985년, 솥단지를 끌며 단식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004년 부산비엔날레에 출품하려던 ‘우리는 행복해요’ 작품 설치 시안의 하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사후 지시서에 따라 비엔날레 행사장 주차장에 설치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뉴욕 시절 작가의 관심사였던 아시아 소수족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 ‘오리엔탈, 마이노리티, 이그조틱’(1990).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이소 작가


‘우리는 행복해요.’ 최근 서울 광화문 KT 사옥 옥상에 대형 입간판이 설치됐다. 북한의 주체사상 현수막을 연상시키는 각진 글씨체. 주황색 바탕에 흰색으로 써 더 선동적인 이 문장이 지난 주말 “못 참겠다”며 광화문광장으로 쏟아진 페미니스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가짜뉴스다. 그러나 실현될 수 있었던 뉴스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박이소 작가의 회고전 ‘박이소: 기록과 기억’전을 하고 있다. 전시는 과천관에서 갖고 있지만 작가의 유작이 된 설치작품 ‘우리는 행복해요’(2004)를 재현해 광화문 인근 서울관 옥상에 설치하려 했었다. 안타깝게도 경복궁 경관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문화재보호법 심의에 걸려 불발되고 말았다. 만약, 설치 장소를 KT 사옥 등 광화문 코앞으로 잡았더라면 성사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촛불 민심이 권력 교체를 일궈낸 민주화의 성지이자 지금도 각종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이라는 장소에 설치됐을 때, ‘우리는 행복해요’가 갖는 힘이 더 세졌을 텐데 말이다.

박이소(朴異素·1957∼2004). 미술에 관심이 없으면 이름이 낯설지 모르겠다. ‘미술계의 기형도(1960∼1989)’라고 할 수 있겠다. 요절했기에 신화화됐다는 평, 길지 않은 인생에도 그 이름이 지속적으로 호출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본명은 박철호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뉴욕으로 유학 가서 현지에서 살았던 10여 년 동안은 박아무개라는 뜻의 작가명 ‘박모’로 살았다. 이후 94년 귀국해선 ‘낯설고 소박하다’는 뜻의 박이소로 개명했다.

박모로 활동했던 뉴욕 시절 초기, 그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추수감사절 식사 초대를 거절하고 대신 한국의 솥단지를 메고 뉴욕 시내를 걷는 일명 ‘단식 퍼포먼스’(1984)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개념미술의 세례를 받았던 뉴욕 시절의 그를 사로잡은 건 ‘동양에서 온 이국적인 소수족’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작이 ‘오리엔탈 마이노리티 이그조틱’(1990)이다. 패션 잡지에 나오는 인물 사진 3개에 각각 이 글씨를 서툰 궁서체로 써넣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지었다. 그가 미국인들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활용한 재료는 가마솥 동양화 간장 쌀밥 메주 서예 같은 동양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제작 방식은 의도된 서투름이다. 솥단지, 난초, 심지어 글씨체조차도 아이들 솜씨처럼 조야하기 짝이 없다. 이는 곧 주류 미술의 기교, 모더니즘의 세련됨에 대한 반격이었다.

귀국 후 박이소로 살았던 서울 시기에 그는 시쳇말로 잘나가는 작가였다. 95년 신설된 삼성디자인교육원(SADI) 교수를 지냈다. 광주비엔날레(1997), 타이베이비엔날레(1998), 요코하마트리엔날레(2001) 등에 잇달아 초대받았고, 한국 미술인의 로망인 베니스비엔날레(2003)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속적 가치를 떠나 소박하게 살고자 했고, 그런 그의 진정성은 작품 ‘정직성’에 녹아 있다. 귀국 후 첫 개인전인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였던 정직성은 빌리 조엘이 부른 인기 팝송 ‘Honesty’를 촌스러울 만치 직역해 작가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다.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더러운 세상에서/HONESTY 너무 듣기 힘든 말 너에게 듣고픈 그 말.” 유튜브에서 검색해 이 노래를 들어보라. 기름기를 걷어낸 담박한 육성. “가만히 벽에 붙은 그림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예민한 얼굴의 예술가가 절로 상상이 될 것이다.

박이소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에 초청받아 의욕적으로 작품을 준비하다 행사를 불과 몇 달 남겨둔 시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가 어째서 하고많은 단어 중에 ‘행복’이란 낱말을 꺼내들었는지, 그 놀라운 선택에 감탄한다. 그는 우연히 TV에서 본 북한 뉴스에서 평양의 건물에 있는 ‘우리는 행복해요’ 글씨를 보고 느낀 아이러니한 감정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 것이다.

한국인은 성공과 출세를 향해 옆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해왔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던 사회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공이 전부인 양 학교에서, 직장에서 강요당하는 사회. 성공 이데올로기가 북한 사회만큼 획일적으로 강요되는 한국 사회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 ‘우리는 행복해요’였다. 그러고 보면 그를 지속적으로 사로잡았던 주제 중 하나가 권력과 성공이다. 80년대 아침방송에서 인기를 누렸던 민병철 생활영어를 소재로 한 ‘미국말 배우기’(1994)도 영어 회화를 잘해 출세하겠다는 욕망을 꼬집었다.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위-10위’(2003) ‘당신의 밝은 미래’(2002) 등은 권력욕을 시각화했다.

그가 떠나고 14년이 흘렀다. 성공 논리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밀어내고, 과로사회를 벗어나자며 정부가 나서서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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