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품들 사이로 얼굴을 빼곡히 내밀었다. 득의만만한 표정의 그녀 주위로 주방세제, 베이비로션, 오렌지주스 등 공산품이 가득하다. 그런데 상품들을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하다. 플라스틱 재질이어야 할 세제와 베이비로션은 헝겊으로 꿀렁꿀렁 만들어졌고, 햄과 사이다도 천으로 된 모조품이다. 이 엉터리 상품들은 모두 화면 속 여성이 부직포를 일일이 꿰매 만든 ‘핸드 메이드 작품’이다.
손바느질을 좋아했던 영국 작가 루시 스패로우(32)는 ‘일상용품을 펠트(부직포)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이에 도전했다. 거리미술을 하던 가난한 작가지망생으로, 끼니를 식빵과 땅콩버터로 때우다가 불현듯 든 생각이다. 그녀는 땅콩버터를 시작으로 온갖 공산품을 펠트를 이어 붙여 감쪽같이 재현해냈다. 그리곤 2014년, 대형 할인점에 밀려 도산한 런던 동부의 구멍가게를 빌려 ‘코너숍’이란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작은 점방에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꿰매 만든 부직포 상품들을 진열했는데 주민들은 재미있다며 앞 다퉈 고객이 됐다.
지난해 작가는 여세를 몰아 뉴욕의 떠오르는 문화지구 하이라인에 좀 더 큰 규모의 편의점을 오픈했다. 아이템도 늘려 먹음직스러운 소시지와 토마토 등도 만들었다. 7개월간 4000여개의 제품을 밤낮으로 만들어 이를 5∼30달러에 팔았는데 호응이 아주 뜨거웠다. 그리곤 올 여름 LA에서 ‘스패로우 마트’라는 타이틀로 무려 3만개의 상품을 슈퍼마켓에 펼쳐놓았다. ‘부드러운 조각’을 팔아 생긴 수익을 골목상권 살리기와 신경장애 어린이를 위해 쓰고 있는 작가는 “예술이 꼭 근엄할 필요가 있느냐”며 밝게 웃는다. 맞다. 현대미술, 꼭 어려울 필요는 없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