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윤의 뮤직플레이] 언제나 그리울 ‘여왕’의 목소리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흑인음악의 큰 별이 졌다. 동료 음악가들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애도를 표했다. 미국 솔뮤직을 대표하는 어리사 프랭클린이 그 주인공이었다. 2010년 췌장암 진단을 받은 프랭클린은 이따금 많이 괜찮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지만 최근 병세가 악화돼 결국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가객의 경력은 61년 긴 세월을 축적하고 마침표를 찍었다.

프랭클린은 가수들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켈리 클락슨 등 노래 잘 부르기로 정평이 난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프랭클린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감격스럽게 고백하곤 한다. 4옥타브를 넘나드는 넓은 음역, 유연함과 박력을 함께 내보이는 탁월한 가창력은 최고로 떠받들기에 모자람이 없다.

1998년 열린 그래미 시상식에서 오페라 아리아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것은 가수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실감할 수 있는 일화다. 원래 무대에는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생방송 10분 전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작진은 마침 시상식에 참석한 프랭클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파바로티에게 맞춰진 상태였기에 키를 바꿀 수도 없었지만 프랭클린은 멋지게 공연을 소화했다.

프랭클린은 일찍부터 대단하다는 칭찬을 수없이 들었지만 데뷔하고 나서 6년 동안은 빛을 보지 못했다. 활동 초창기인 61년 ‘Rock-a-Bye Your Baby with a Dixie Melody’가 빌보드 싱글 차트 37위에 오른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천재도 무명의 터널을 오래 거쳐야 했던 것이다.

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해는 67년이었다. ‘I Never Loved a Man(The Way I Love You)’가 빌보드 싱글 차트 9위를 기록한 데 이어 오티스 레딩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Respect’가 1위에 올랐다. 흑인들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는 공민권(公民權) 운동이 한창일 때 존중을 부르짖는 가사가 흑인들의 처지와 맞아떨어지면서 ‘Respect’는 큰 사랑을 받게 된다. 프랭클린이 살아온 고장이자 그해 공민권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디트로이트의 시장은 이듬해 2월 16일을 ‘어리사 프랭클린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흑인들의 억울한 마음을 터뜨리는 수단이었던 리듬앤드블루스(R&B)는 60년대 들어 자유로움과 힘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가창의 형태가 변모한다. 이렇게 바뀐 스타일이 솔뮤직이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가창에다 사회성을 띤 노래를 부른 덕에 프랭클린에겐 60년대 후반부터 ‘솔의 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수식이 붙게 된다.

68년 ‘Lady Soul’ 앨범을 낸 뒤로는 앨범 제목을 따 ‘레이디 솔’이란 별명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솔뮤직에만 정박하지 않았다. 80년대로 넘어와서는 팝 록 디스코 댄스음악 등을 시도하며 장르의 반경을 넓혔다. 더불어 후배 뮤지션들과 활발히 협업함으로써 젊은 감각을 내보였다. 프랭클린은 87년 여성 뮤지션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유수의 시상식에서 수십 차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화려한 실적은 훌륭한 표현력과 이에 자만하지 않고 탐구를 거듭한 부지런함 덕분이었다. 그렇게 반세기 넘게 후배들의 귀감이었고 인권운동의 상징이었던 거성이 빛을 잃었다. 많은 이가 당분간 헛헛함을 느낄 듯하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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