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여성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아이 옆에는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공중에는 단잠에 빠진 소년이 둥실 떠 있고, 외로운 사슴은 돌아갈 곳을 찾고 있다. 한 편의 슬픈 서사극 같은 미디어 작품을 만든 이는 유럽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는 한호(1972∼)다. 파리8대학에서 조형예술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을 마친 한호는 빛과 회화가 결합된 설치작업을 시행한다. 빛으로 그림을 그리고, 무대미술처럼 드라마틱하게 드러내 왔다. ‘영원한 빛, 동상이몽’이란 이 대형 작품은 시간에 따라 빛의 조도와 색이 바뀌면서 관객을 오묘한 판타지의 세계로 이끈다.
‘미디어 회화’라는 새로운 작업을 구현하기 위해 한호는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캔버스에 장지를 입힌 후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늘과 대지를 뒤덮는 구름, 산과 바다, 새와 사람을 그려 넣는다. 그림 전체에 일일이 작은 구멍을 뚫는 타공 작업을 시행한다. 구멍이 생긴 화폭 뒤에 조명과 거울을 설치하고, 영상을 쏘면 작업은 끝난다. TV 브라운관의 주사선을 따라 나오는 영상 이미지처럼 작가는 빛과 그림자로 시시각각 변하는 미디어 회화를 완성한다.
떠난 자와 남은 자, 사랑과 이별, 꿈과 현실을 교차시킴으로써 작가는 하나의 시공간에서 서로 만나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한호의 작업은 성남큐브미술관이 기획한 ‘AT MUSEUM’전(9일까지)에서 만날 수 있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시도한 혁신적인 작업을 모은 이번 전시에는 뮌, 양정욱, 이병찬, 한경우도 참여했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