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출신으로 영국에서 작업하는 기드온 루빈(1973∼)은 지난해 런던 프로이트뮤지엄으로부터 전시 제의를 받았다. 정신분석학의 거장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오스트리아를 등지고 런던으로 탈주한 지 80년 되는 해를 기리는 전시 요청이었다. 이에 루빈은 2차대전 때 출간된 나치 책자를 어렵사리 구했다. 히틀러 자서전이 포함된 낡은 책자를 펼치는 순간 오싹했다. 유태인 600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학살의 현장이 떠올랐던 것. 그의 조부모도 동유럽에 머물다가 1939년 이스라엘로 피신했기에 더욱 전율이 일었다. 끔찍한 책을 대면하기 힘들었으나 책자 속 글귀와 이미지를 검게 칠해 ‘Black Book’으로 만들었고 올봄 작품전을 열었다.
가슴에 커다란 나치 문장이 새겨진 셔츠를 입은 여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운동하는 이미지에서 나치 문장과 얼굴이 지워졌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진에 무심한 흰구름이 추가되며 본래 뜻이 확 바뀌었다.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뒤바뀌는 게 얼마나 순식간인지 놀랐다. 역사 전복을 경험하면서 프로이트와 조부의 과거, 오늘날 난민들 상황을 돌아보게 됐다”고 밝혔다.
역사의 전복과 전이를 통해 인간의 기억을 성찰하는 작가는 원래 사실적 인물화를 그려 왔다. 그러나 뉴욕 9·11 현장을 접한 뒤론 ‘얼굴 없는 회화’로 선회했다. 오래된 익명의 사진 속에 잔재하는 이미지를 지워서 오히려 역사를 환기시키는 작업은 미국 스위스 독일 중국에서 호평을 얻고 있다. 한국에서도 첫 개인전(갤러리 EM)이 개막됐다. 형상 없는 얼굴의 맑은 출품작들은 고요한 파장을 일으키며 사라진 초상을 반추케 한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