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출신으로 고시 낙방 후 절망 “합격자는 극소수” 실패 받아들여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 개척
자존감만으론 삶의 질 개선 어려워 실패에 직면하면 우울증 걸릴 위험
스스로 우열을 가리는 데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 인정해야 건강
전북 전주에 사는 사회초년생 A씨(32)는 불과 2년 전까지 ‘행정고시 장수생’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수년간 시험을 치렀지만 합격의 벽은 높았다. 영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장학금을 받고 국립대 법대에 입학하는 등 공부에 관한 자존감이 무척 강했던 그에게 견디기 쉽지 않은 시련이었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합격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해마다 불합격이 반복되자 그는 지쳐갔다. 고시생 6년차였던 2016년, A씨는 시험을 포기했다. 합격이라는 결과로 회복하려던 자존감은 더욱 바닥까지 내려갔다. 고시에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도 힘들었지만 주변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걱정에 더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노력이 부족해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도 그를 괴롭게 했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A씨가 마음을 다잡은 건 어느 날 문득 실패를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나서였다. 불합격은 사실 그뿐 아니라 극소수 합격자를 제외한 응시자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인생에 다른 선택지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닫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시 취업준비를 시작한 그는 채 1년이 지나기 전 만족스러운 직장에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심리학자들은 A씨 경우를 ‘자기자비(self-compassion)’로 우울을 극복한 사례라고 설명한다. 자기자비란 실패를 경험했을 때 스스로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A씨처럼 너그럽게 스스로를 돌보고 다독이는 성향을 뜻하는 심리학 개념이다. 자신이 직면한 상황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에서 현 상황을 왜곡해 받아들이는 자기연민과 다르다. 다른 사람도 자신과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거나 고통을 겪는다는 걸 인식하는 상태 역시 자기자비에 포함된다.
자존감만으로는 부족해
지난 십수년간 한국 사회에서 중시된 가치 중 하나는 ‘자기존중감’, 즉 자존감이었다. 진학과 취업에서 결혼, 육아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단계에서 극심해진 경쟁으로부터 개인의 정신건강을 지키기가 어려워진 탓이었다. 교보문고에 등록된 2000년대 이후 출판서적 중 이와 연관된 제목의 책은 총 224권이다. 지난달까지 따지면 최소 한 달에 한 권꼴로 자존감에 관한 책이 출간됐다. 인문·심리학, 자기계발, 종교, 육아·동화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책에서 자존감을 다뤘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심리학계에서는 높은 자존감만으로는 삶의 질을 개선시키지 못한다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목적으로 시행된 심리치료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연구결과도 줄지어 나타났다.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존감이 높게 형성되는 부작용이 관찰되기도 했다. A씨처럼 계속된 성공으로 자존감이 높았던 이가 실패에 직면했을 때 쉽게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부정적 사례 중 하나다.
자기자비는 이에 대한 대안 성격으로 제시돼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심리학자인 크리스틴 네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가 2003년 동양철학에서 착안해 개념화한 뒤 2014년 국내 학계에도 소개됐다. 개인의 자기자비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자기자비 척도’도 학계 연구로 국내 실정에 맞게 번안돼 있다. 사회적 평균을 기준으로 스스로 우열을 가리는 데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해야 건강한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지난해 자기자비를 다룬 대중심리학 책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을 펴낸 박진영 미 노스캐롤라이나대 의과대 통합의학 연구원은 책에서 “높은 자존감을 추구하는 일에는 진짜든 가짜든 근거가 필요하다는 데 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평가’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자존감 추락과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고 덧붙였다.
‘자기자비 없는’ 자존감의 해악
서울 소재 모 명문대 출신인 B씨는 모교를 나온 사실을 주변에 자주 말한다. 직장에서는 물론 일상에서 만난 사람에게도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꼭 물어본다. 같은 대학을 나온 직장 후배가 있으면 모교 출신들이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지 강조한다. 동문이 사회에서 활약하는 소식을 들으면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B씨는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도 모교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학교 출신이면 웬만해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회사 회식처럼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상대의 능력을 깎아내리며 출신 대학을 들먹이는 일도 있다. 반대로 자신의 출신 대학보다 더 사회적 평가가 높은 대학 출신 앞에서는 입을 다문다. 심리 전문가들은 B씨를 전형적인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의 사례로 지적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기자비의 정도가 낮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B씨처럼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인을 깎아내리거나 이용한다. 자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아랫사람을 착취하는 이들도 이에 속한다. 심리학계에서는 이 같은 행동이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에 따라 자신에 대한 평가가 크게 흔들리므로 주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존감을 유지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자기자비 없이 단순히 자존감만 높은 이들은 남들에게 우호적이거나 협동적이지 않아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등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이우경 서울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자존감에는 (자신에 대한) 평가라는 요소가 들어가므로 스스로가 남보다 낫다고 여길수록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세란 서울디지털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실제 연구를 해보면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자비가 낮고 자존감만 높은 사람들은 정서적 부침이 심하다”면서 “반대로 자기자비가 높아 스스로를 존중하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연대감과 공감능력이 좋았다”고 말했다.
‘자비 없는’ 한국 사회
해외에선 다양한 방면에서 이미 자기자비 치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미 켄터키주 루이빌대 연구팀은 40세의 한 고도비만 남성을 대상으로 ‘신체에 대한 자기자비(body compassion)’를 길러내는 실험을 진행해 지난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 남성은 실험 전까지 시간과 돈을 들여 살을 빼면서도 자기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해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 거울을 볼 때마다 슬픔과 분노, 후회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으며 이는 아내와 자녀 등 가족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구팀은 이 남성에게 일상에서 신체와 관련된 생각이나 경험, 감정을 기록하게 했다. 스스로의 몸을 자기자비의 관점에서 관찰하도록 했다. 5주간 치료 뒤 남성의 증상은 꾸준히 나아졌다. 그는 치료 뒤 연구팀과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은 체중계 위의 숫자를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헬스장에 가서 계획한 운동을 하거나 상점에서 과일과 채소를 고르는 일이 이제는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평생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심리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이 유독 자기자비가 약하다고 지적한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강요받는 환경 탓이다. 학교에서 매긴 점수에 따라 조건적으로 가치를 매기고 스스로를 질책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는 설명이다. 외모와 경제적 능력 등으로 서로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문화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박진영 연구원은 “삶의 기준이 너무 빡빡해 숨쉬듯 서로를 평가하고 조금만 벗아나면 자신과 타인에게 매질을 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세란 교수는 “심리치료 과정에서 자기자비를 재양육하기 위해 다른 이가 따뜻한 말을 해줬을 때, 혹은 따뜻한 말을 해줘야 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상상하게 한다”면서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과정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 상상을 잘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자비는 결과에 상관없이 상대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돌봐주는 교육과 연결되어 있다”면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