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 익숙한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미국에서는 가끔 일어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두 명에 대해 유죄 결정이 내려진 것도 그런 경우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청와대가 발칵 뒤집어졌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은 다르다. ‘러시아 스캔들’은 2016년 대통령선거를 정조준하고 있다. 트럼프 정권의 정당성이 걸린 문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특검 수사를 ‘마녀 사냥’이라고 비난하고 특검팀을 ‘갱’이라고 부른다. 한국이었다면 국회는 난장판이 되고 야당은 장외투쟁에 나섰을 것이다.
싱크탱크에서 일하는 외교전문가를 만난 적이 있다. 트럼프 최측근 인사들의 유죄 결정을 화제에 올렸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CNN, NBC가 보도하는 것을 다 믿지 마세요.”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이 보도한 내용은 다 팩트일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측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게 트럼프의 미국이죠.” 주미 대사관 관계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미국 사람들이 워싱턴에서 한국의 일부 보수 종편을 본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 정부의 잘못만 보이겠지요. 지금 워싱턴포스트나 CNN의 처지가 이와 비슷합니다.”
미국 주류 언론은 ‘트럼프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고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기력한 민주당은 탄핵 카드를 겁내고 있고, 트럼프 지지층은 굳건하기 때문이다. 저학력 백인 남성들이 핵심인 트럼프 지지층은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관심이 없다.
최측근이 유죄 판결을 받아도, 성추문 의혹이 계속돼도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견고하다. 여론조사마다 다르지만 40%대 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 라스무스의 8월 31일 조사에서는 48%까지 나왔다. NBC방송은 트럼프 지지율이 수치상으로 크게 상승할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지지 강도는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지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해 ‘만족’에서 ‘매우 만족’으로 강화되는 추세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8월 12일 워싱턴 시내에서 열렸던 인종차별 반대시위 현장에서 60대 백인 여성을 만났다. 그는 “나는 리처드 닉슨의 워터게이트를 이 곳 워싱턴에서 봤던 사람이다. 트럼프는 인종차별을 방조하고 있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분노했다. 여기서 인터뷰가 끝났다면 그를 합리적인 인사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트럼프는 북한의 김정은에게 속고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미 대화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합보다 갈라치기의 정치인이다. 그는 ABO(Anything But Obama·뭐가 됐든 오바마와 반대로 한다)로 국정 운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반(反) 트럼프 진영도 적개심이 지나쳐 평정심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트럼프가 미우니, 트럼프가 밀고 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마저 덩달아 미운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협상에 목을 매고, 반 트럼프 진영은 그 협상에 의심을 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미워하면 닮는다더니,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반 트럼프 진영도 ABT(Anything But Trump·뭐가 됐든 트럼프와 반대로 한다)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인다.
‘러시아 스캔들’이 권좌를 위협할 정도까지 비화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북핵 위기론’을 다시 꺼내들 수 있다는 시나리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의 돌발적인 성향은 이런 음모론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예측하기 힘들고, 워싱턴포스트는 믿을 수 없고, 반 트럼프 세력에게는 지렛대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경우의 수를 면밀히 따져보는 냉철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