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5명으로 구성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사단은 5일 핵 프로그램 신고 과정을 3단계로 쪼개 단계마다 안전 보장 조치가 뒤따르는 구상을 북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특사단은 1단계로 북한이 6주 내 핵시설을 신고하면 그에 맞춰 종전선언을 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안다”며 “2단계로 핵물질 리스트를 제출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핵탄두 전량을 공개하면 그에 따라 북·미 연락사무소 개소, 대북 제재 완화, 평화협정 체결 협상을 시작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종적으로 신고를 마치는 시한은 1년 이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계별 신고 방식은 서로 상대의 선(先)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 북·미 사이를 절충한 것이다. 미국으로선 북한의 핵 리스트를 한 번에 확보하지 못하는 불만이 있고, 북한으로선 1년 안에 핵 신고 및 검증, 폐기 절차를 압축적으로 밟아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한발씩 물러서서 각자 원하던 것을 손에 넣게 되는 셈이다. ‘1년 내 비핵화’ 시간표는 4·27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동의한 것이라고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특사단은 북한이 핵 신고를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면 이를 토대로 미국을 설득하는 또 다른 중재안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통은 “특사단이 미국의 기존 입장을 북측에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면 비핵화 분야에선 아무 성과가 없을 것”이라며 “다만 북한도 핵을 내려놓은 데 대한 가시적 성과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한국 정부의 중재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핵 신고는 북한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다. 미국에 군사적 공격 좌표를 공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특사단이 북측에 직접 핵 신고를 설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분위기가 있다.
반면 미국은 핵 신고를 비핵화의 핵심 조치로 보고 있다.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특사단 방북 전날 50분간 길게 통화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사항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백악관은 4일(현지시간) “양 정상은 김 위원장이 동의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를 달성하기 위해 진행 중인 노력을 포함, 최근의 한반도 상황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남북 관계 개선이 평화체제 구축에 기여할 것이라는 청와대 발표와는 온도차가 있다.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취소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남북 정상회담 전 성사되는 수순을 가장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재개된 뒤 남북 정상이 만나면 관계 개선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 정권수립 70주년 기념일인 9·9절과 이달 말 유엔총회 등 일정을 감안하면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이 당장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