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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견뎌봤니, 인간은 진짜 한계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않았다”

케냐의 마라토너 엘리우드 키프초게가 지난해 5월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의 한 자동차 경기장에서 열린 마라톤 이벤트에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이 이벤트는 42.195㎞를 2시간 안에 인간이 주파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자리였다. 마라톤에서 ‘2시간의 벽’은 인간 지구력의 한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벤트는 마라토너들이 경기장 트랙을 계속 뛰는 형태로 진행됐는데, 키프초게는 당시 세계 최고기록을 무려 2분32초나 단축한 2시간25초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AP뉴시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의 겉모습은 유발 하라리의 대표작 ‘사피엔스’와 흡사하다. 사피엔스가 그렇듯 책의 표지엔 흰색 바탕에 빨간 글씨로 제목이 새겨져 있다. 사피엔스가 지문 형태의 손도장으로 표지를 꾸몄다면 이 책엔 커다란 발도장이 찍혀 있다.

부제도 마찬가지. 사피엔스에는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이라는 소제목이 붙었는데, ‘인듀어’의 표지엔 ‘몸에서 마음까지, 인간의 한계를 깨는 위대한 질문’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띠지에는 저자의 사진이 담겼는데, 공교롭게도 백인에 민머리인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라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자, 그렇다면 내용은 어떨까. 굳이 비슷한 점을 꼽자면 가독성이다. 드문드문 등장하는 동어반복 수준의 이야기가 거슬리지만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를 향해 치닫는 화술은 하라리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누구나 재밌게 읽을 만한 금주의 책이다.

‘견디다’라는 뜻을 지닌 ‘인듀어(Endure)’라는 단어를 간판으로 내건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다룬다. 저자 알렉스 허친슨의 이력은 독특한데, 한때 그는 캐나다의 달리기 선수였다. 선수 생활을 접은 뒤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았고 현재는 미국 뉴욕타임스나 뉴요커 같은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지구력을 다룬 글을 쓸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을 갖춘 셈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간 한계에 도전한 선수들과 지구력을 연구하는 학자 수백명을 인터뷰했다. 그러면서 각종 과학 논문까지 참고해 “인간은 아직 진짜 한계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긴 이 책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넘겨짚었다. 인체라는 건 기계와 비슷하다고. 책에 담긴 비유를 그대로 옮기자면 “(인체는) 액셀러레이터 페달에 벽돌을 올려놓은 자동차처럼 연료가 바닥나거나 냉각기 과열로 고장 날 때까지 움직이다가 멈추는 시스템”이라고. 즉, 심장의 크기나 폐의 용량, 근육의 강도 등이 인간이 지닌 지구력의 세기를 결정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식이라면 인간의 지구력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리학의 지도만으로는 지구력의 세계를 자세히 탐사할 수 없다. 만약 마라톤 선수라면 어떤 동기로 경기에 임하는지, 경기 전날 숙면을 취했는지, 평소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경기에는 어떤 신발을 신고 무슨 옷을 입었는지가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게 불문가지다.

지구력이 무엇인지 알려면 심리적인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 저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인체의 한계를 관장하는 뇌로 향한다. 때로는 뇌가 육체적 한계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인체를 통제해버린다는 주장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저자는 뇌를 지구력의 “숨겨진 저장고”라고 명명하면서, 뇌를 제대로 활용하면 지구력의 세계는 더 확장될 것이라고 적었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버티고 이겨내는 건 얼마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처럼 들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례와 과학적 데이터를 토대로, 흥미로운 비유까지 곁들여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이 책이 선사하는 감동적인 대목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마라톤이나 사이클처럼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에서는 세계신기록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과학적인 훈련이나 최첨단 기술이 기록 경신의 끌차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만약 이게 전부라면 경마 같은 분야에서도 신기록은 계속 경신돼야 한다. 경마의 세계에도 인간은 기록 향상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가장 큰 경마 대회인 ‘켄터키 더비’만 하더라도 기록은 1950년대 이후 정체돼 있다.

저자는 “마라톤 챔피언과 경마 우승마는 경이로운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서 “둘의 차이가 있다면 인간 쪽은 현재를 넘어 미래를 내다본다는 점”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신의 라이벌이 1분59초40의 기록을 세웠다면 당신은 1분59초30 안에 결승선을 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나는 출발선에 설 때마다 가장 큰 적이 내 두뇌의 잘 정비된 보호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다. 뇌가 몸의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처리 과정을 변환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인간의 한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에게 믿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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