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82) 전 부총리는 지난 7월 출범식을 갖고 활동에 들어간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지난 13일 서울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3층에서 한 위원장을 만나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와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들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기념사업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정부에 복귀하셨습니다.
“3·1운동은 99년 전에 발발한 비폭력 평화운동인데 1919년까지 선진국을 포함한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이 평화를 내세우며 비폭력으로 전개된 예가 없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지주들을 살해하는 등 유혈혁명이었어요. 그런데 2년 후 한반도에선 2000만 인구의 10%인 200만명 이상이 손에 태극기만 들고 일경의 총칼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어요. 총을 맞아도 감옥에 끌려가도 폭력으로 맞서길 거부했지요. 인도의 비폭력 운동가 간디와 시인 타고르, 간디의 문하생 네루 등이 한반도를 ‘동방의 불빛’이라고 칭송했어요. 3·1운동으로 감동받은 애국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어 아시아 최초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고요. 민주공화제와 비폭력과 평화, 이 세 가지는 정말 대단한 가치입니다.”
-당시 인구의 1.5%에 불과했던 기독인들이 만세운동의 주축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교회도 47곳 불탔고요.
“기독교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1880년대부터로 보면 약 30여년 된 건데, 짧은 역사의 한국교회가 비폭력 평화운동의 중심이었죠. 천도교도 함께했고요. 교회가 있는 곳마다 만세운동이 있었고 미션스쿨이 있는 곳마다 만세운동이 일어났어요. 그 전통을 지금의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잘 따라 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3·1운동 정신 이전에 갈릴리 예수의 선교 정신, 그게 필요해요. 원수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 내면에 똬리를 튼 악을 해체시키는 것 말이죠.”
-1980년대 해직교수 시절 미국 유니온신학대에서 본업인 정치사회학 외에 신학을 공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부모님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요. 대구에서 성결교회를 지키신 분들이었고 보수적이었지만 참 따듯한 신앙인이셨어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했던 1951년 1월 겨울은 유난히 추웠어요. 우리 집은 경북 김천이었는데 주일날 아버님이 9남매를 모아놓고 김천역에 나가 가장 어려워 보이는 피란민 가족을 데려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교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설교를 들으신 듯해요. 역에 가보니 아이 셋을 둔 40대 초반의 부부가 있는데 기침을 심하게 하고 너무 딱해 보여 모시고 왔지요. 한겨울에 피난하다 폐병에 걸린 것 같았어요. 각혈도 하고요. 당시 아버님은 초등학교 교감이셔서 관사에 방이 3개 있었는데 이 가족에게 방 하나를 내주셨어요. 날이 풀리는 4월까지 석 달 동안요. 우리 9남매는 한 방에 지내야해서 입이 나왔죠. 당시 부모님은 목사님이 말씀을 증거하면 주님 뜻으로 알고 행동으로 옮기셨어요. 훈훈하면서도 나눌 줄 아는 보수, 따듯한 마음을 갖고 어려운 사람과 고통을 나누면서 힐링해 주는 보수적 교회와 목회자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보수죠.”
-젊은 기독인들의 교회 이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12년간 혈루증 앓은 여성 이야기가 나와요. 사람들에게 더럽다고 버림받은 여인이었죠. 예수님은 누군가 옷을 잡아당긴 것을 느끼고 돌아본 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불쌍한 여인에게 딸이라 불러주고 내가 아니라 네 믿음이 고쳤다 하고 이제 진리를 접했으니 자유롭고 평안히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이게 선교이고 전도예요. 가장 낮은 자를 섬겼던 갈릴리의 예수 정신부터 회복했으면 해요.”
글·사진=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