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고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서 익명으로 기부를 실천하는 ‘키다리 아저씨’들이 전국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아버지가 해오던 익명 기부를 사후에 자녀들이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17일 대구 수성구에 따르면 지난 12일 익명을 요구한 한 남성이 쌀과 라면을 기부했다. 이 남성은 수성구민운동장에 쌀과 라면이 가득 실린 5t 트럭 2대를 보낸 뒤 ‘신원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 했다고 한다.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그가 놓고 간 것은 10㎏짜리 쌀 2000포대와 라면 1200박스였다.
수성구청에서는 이번에 쌀과 라면을 기부한 익명의 남성이 2003년부터 10년 넘게 매년 추석 때마다 쌀 등을 기부하던 이름 없는 한 노인의 아들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 노인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기로 마음을 먹고 수성구청에 익명의 기부를 이어왔다. 노인의 성은 박씨이고, 평안남도 출신에 6·25전쟁 때 월남해 대구 서문시장에서 장사로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이 노인은 201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가 96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성구청에 따르면 노인의 익명 기부는 사후에 자녀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들과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매년 기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성구청은 기부 받은 쌀과 라면을 관내 경로당과 무료급식소 등에 나눠줄 계획이다.
충남 보령시 주포면 연지리에서 연지농장을 운영하는 이보복씨도 지난 14일 햅쌀 20㎏짜리 50포대를 보령시와 3개 면에 기탁했다. 이씨는 20여년 전부터 시청 앞에 몰래 쌀을 놓고 가던 ‘얼굴 없는 천사’로 유명했으나 최근 신원이 알려졌다. 이씨는 올해 첫 추확의 기쁨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기 위해 기부를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14일 울산 중구 반구1동 행정복지센터도 50대 남성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1만원권 온누리상품권 50장을 기탁하고 사라졌다. 이 남성은 지난해에도 50만원을 반구1동 행정복지센터에 전달했다. 병영2동 행정복지센터에도 같은 날 익명의 기부자가 쌀 10㎏짜리 20포대를 전달하고 모습을 감췄다.
지난 3일에는 경남 통영시 도천동행정복지센터에 익명의 기부자가 쌀 20㎏짜리 20포대를 놓고 갔다. 지난달 24일에도 경기 가평군에서 얼굴 없는 천사가 청평면사무소에 500만원 놓고 갔다. 이 기부자는 지난 3년간 5차례에 걸쳐 500만원씩 2500만원을 기부했다.
대구=최일영 기자, 전국종합 mc10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