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몽파르나스 보지라르가 98번지. 한국의 신여성 이성자(1918∼2009)가 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던 곳이다. 낡은 건물 6층의 다락방을 구한 이성자는 한 평짜리 좁은 공간에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렸다. 1956년 초에 완성한 이 풍경화는 다락방에서 내려다본 뜰과 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눈 내린 마당에서 어린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화가는 고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화폭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다. 인적은 간데없고, 건물들은 캔버스 상단에 일렬로 도열해 있다. 대지의 흰 눈 때문에 하늘과 건물은 어둡고 칙칙하게 다가온다. 그림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나무다. 잎새를 다 떨군 채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형상이지만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강렬하다. 고통과 번민 속에서도 결기를 다지는 화가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성자는 파리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 이 작품을 출품해 호평받았다. 하늘을 생략한 대담한 구도, 건물과 나무를 수직 수평으로 처리한 것이 주효했다. 이후 유수의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고 쭉쭉 뻗어나갔다. 1957년부터는 추상으로 선회해 한국 작가 중 가장 먼저 순수추상의 아름다움을 다채롭게 구현했다.
그러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의사와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지만 1951년 파경을 맞고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초기 디자인에 도전했지만 재능을 알아본 교수의 추천으로 미술을 전공했고, 남프랑스 투레트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일평생 외롭게 화폭과 씨름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은하수, 우주를 그린 추상에는 이성자의 소망이 켜켜이 담겨 있다.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갤러리현대는 초기시대를 조망하는 특별전(∼10월 7일)을 꾸렸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