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7가구 중 하나꼴로 갖고 있고 전 세계에서 한국에 다섯 번째로 많은 소형 전자기기. 필수품은 아니어서 없어도 그만이지만 갖고 있으면 신기하고 편한 제품. 바로 스마트 스피커로도 불리는 인공지능(AI) 스피커다. 다양한 업종의 회사들이 국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기술력과 마케팅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에서 AI 스피커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고 있다.
28일 IT 시장조사 업체 카날리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전 세계 AI 스피커 수는 지난해보다 2.5배 늘어 1억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미국(점유율 64%) 중국(10%) 영국(8%) 독일(6%)에 이어 3% 점유율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업계가 추산한 시장 규모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해까지 50만대의 AI 스피커가 전국에 깔려 있었고 올해 1분기에는 150만대를 돌파했다. 이 숫자는 연내 300만대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1인 가구를 포함한 한국 전체 2000만 가구의 15% 수준이다.
국내에서 AI 스피커는 주로 인터넷·TV 서비스에 가입할 때 사은품으로 지급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동통신 전문 리서치 기관 컨슈머인사이트가 최근 조사한 결과를 보면 AI 스피커 구입 경로는 통신사 콜센터나 대리점이 51%로 절반을 넘는다. 온라인 쇼핑몰이 21%, 경품·선물·이벤트가 15%로 뒤를 이었다.
AI 스피커 기술력이 크게 발전했고 관련 서비스도 강화됐지만 사용자들의 만족도는 높지 않은 편이다. 컨슈머인사이트 조사에서 ‘AI 스피커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49%에 그쳤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음성 명령이 잘 되지 않는다’가 50%로 가장 높았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곤란하다’(41%), ‘소음을 음성 명령으로 오인한다’(36%)는 불만도 많았다. 컨슈머인사이트 관계자는 “현재까지 AI 스피커 수준은 저장된 정보를 음성인식을 통해 서툴게 검색하는 장치에 가깝다”면서 “이는 치열한 개발경쟁 분위기 속에서 서둘러 출시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AI 스피커의 ‘킬러 콘텐츠’는 음악 선곡·감상이지만 그 자체로 소비자들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각 스피커와 연동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가입해 이용권을 유료로 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스마트폰으로 유료 음원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해도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AI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유료 서비스를 결제하지 않으면 1분 미리듣기만 가능하다.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AI 스피커와 스마트폰을 블루투스로 연결해 단순히 블루투스 스피커처럼 쓰는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한국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업체 간 경쟁은 점차 치열해지고 있다. 2016년 SK텔레콤이 최초로 AI 스피커를 선보인 이후 지난해 KT, 네이버, 카카오, LG전자가 연이어 제품을 개발해 출시했다. 구글은 지난 18일 국내 시장에 진출했고, 삼성전자까지 내년에 AI 스피커를 판매하며 후끈 달아오른 시장에 불을 붙일 것으로 전망된다.
각 업체들은 자사 제품 차별화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 AI 스피커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이통업체들은 대체로 기능성과 서비스 확장을 통해 수성에 나서고 있다. SK텔레콤은 자사 AI 스피커 ‘누구’에서 뉴스를 들을 때 특정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할 수 있도록 했다. 음성 인식 과정에서는 발성 구간을 찾는 기술을 적용해 음성 인식률을 대폭 향상시켰다. 지난 7월에는 무드등 기능을 탑재한 ‘누구 캔들’을 출시했다. SK텔레콤은 올 4분기에 사용자 개인에게 최적화된 AI를 구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KT는 교육 콘텐츠 강화에 나서고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 AI 스피커 ‘기가지니’가 동화책의 단어를 인식하고 이에 맞는 효과음을 내는 서비스를 교육기업 대교와 협력해 올 상반기 선보였다. 최근에는 삼성 HR 전문 기업인 멀티캠퍼스와 손잡고 기가지니를 통해 다양한 교양 강의를 시청할 수 있는 세리시이오(SERICEO)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 7월에는 한손에 들어오는 크기로 배터리를 탑재한 휴대용 스피커 ‘기가지니 버디’를 출시했다.
이통 3사 가운데 가장 늦게 AI 스피커 시장에 뛰어든 LG유플러스는 네이버와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네이버의 AI 스피커 ‘프렌즈’에 LG유플러스의 인터넷 TV와 홈 사물인터넷(IoT) 제어 기능을 탑재하는 방식으로 신제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포털 기업으로도 불리는 종합 IT 기업들은 서비스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캐릭터를 AI 스피커 홍보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네이버는 지난달 27일 ‘프렌즈 미니’ 라인업에 도라에몽 에디션을 추가했다. 애니메이션 도라에몽 성우의 목소리와 대화를 할 수 있고 도라에몽 스토리에 대한 내용도 들을 수 있다. 앞서 네이버는 ‘브라운’ ‘샐리’ 등 자사를 대표하는 캐릭터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미니언즈’를 각각 접목한 스피커도 선보인 바 있다.
카카오는 지난 10일부터 기존 AI 스피커 ‘카카오미니’에 휴대성을 더한 제품인 카카오미니C를 판매하고 있다. 두 종류만 탑재가 가능했던 캐릭터 피규어가 카카오미니C에서는 총 7종으로 늘었다. 스피커를 위한 충전식 배터리와 원거리에서도 음성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리모콘까지 패키지로 출시됐다.
전통적으로 가전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던 전자업계는 음질로 승부수를 띄운다. 스피커의 본질은 음악 감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삼성전자 IM(IT·모바일)부문을 이끄는 고동진 사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의 AI 스피커 ‘갤럭시 홈’은 음질에 중점을 둔 제품”이라며 “소비자들이 돈을 지불할 때는 결국 AI의 능력보다 음질을 중요하게 볼 것”이라고 했다.
LG전자는 지난달 31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가전전시회(IFA)에서 고출력 오디오 브랜드 ‘엑스붐’에 AI 기술을 융합한 ‘엑스붐 AI ThinQ(씽큐)’ 2종을 소개했다. 영국 명품 오디오 브랜드 메리디안 오디오와 협업해 개발한 제품으로 일부 모델은 일반 음질의 음악 파일을 고음질로 바꿔주는 기능도 지원된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