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9일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미국의 상응 조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을 영구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 핵 개발의 상징이자 중심 시설이다.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에 이렇듯 구체적인 시설을 지목해 폐기 의사를 명시한 적은 없었다. 김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만큼 북한은 향후 핵 협상에서 이를 기준으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국이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핵 리스트 신고에 대해선 합의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는 지적도 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프레스센터 브리핑에서 “북측이 영변 핵시설 폐기 의사를 밝히면서 핵 불능화의 실천적 단계로 돌입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영변 핵시설 불능화는 앞으로 새로운 핵물질을 생산하거나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원천 차단한다는 의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며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 문제는 북·미 대화 진척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으로 방북한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도 백화원 영빈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측이 핵의 기본이 되는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 생산시설이 있는 영변을 영구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건 최초”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엔진실험장 일부 시설을 폐쇄하며 미래 핵 활동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미국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시설, 핵물질, 핵무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제거를 요구해 괴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비록 조건부이긴 하나 현재 핵 능력을 없애는 쪽으로 한발 다가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핵위협방지구상(NTI)에 따르면 영변 핵시설 안에는 확인된 건물만 390개가 있고 여기에 실험용 원자로, 재처리시설, 우라늄 농축시설 등이 산재해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업무에 정통한 한 인사는 “핵시설의 영구 폐기는 원칙적으로 북한이 시설 목록을 제출하고, 신고 내용이 맞는지 IAEA 같은 공신력 있는 사찰단이 확인한 뒤 폐기 이행을 검증하는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영구 폐기는 신고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다.
과거 북핵 협상을 되짚어보면 영변 핵시설 폐기가 처음 나온 내용은 아니다. 북한은 13년 전 ‘9·19 공동성명’에서 이미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 포기를 공약했다. 이후 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를 약속했는데, 1단계가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및 IAEA 사찰단 복귀(2007년 ‘2·13 합의’)였다. 2단계 조치는 영변 핵시설 내 5㎿ 실험용 원자로,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 핵연료봉 제조시설의 연내 불능화(2007년 ‘10·3 합의’)였다. 그러나 이런 합의를 이끌어낸 북핵 6자 회담은 신고와 검증을 둘러싼 이견 탓에 2008년 12월 회의를 끝으로 유명무실해졌다. 2012년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나온 ‘2·29 합의’에도 북한이 영변 우라늄 농축 활동을 임시 중지하고 이에 대한 IAEA 감시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는 “영변 핵시설 폐기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고 원론적인 제안”이라며 “아직 여러 변수가 남아 있어 협상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폐기에 ‘미국의 상응 조치’를 연계시켰다. 북한이 요구해온 종전선언을 포함, 북·미 관계 개선 조치로 해석된다. 청와대가 평양공동선언 외에 추가로 논의한 내용이 있다고 밝힌 만큼 미 정부의 반응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평양공동선언에는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영구 폐기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는 국제사회의 검증 지적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사일 엔진시험장 폐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6·12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로 강조하던 것이어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맞춤형 제안으로 해석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 정부 내 강경파와 의회에서 비핵화 합의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김 위원장의 제안을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남북이 속도를 내면 미국도 그 흐름에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권지혜 이상헌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