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제의 적과 대화 중이다. 북한은 한때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적이다. 오늘 우리나라 대통령은 북한 최고 지도자를 만나고 있다. 신간 ‘적과의 대화’는 전쟁 당사자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면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대화록이다. 1997년 6월 20∼23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회의 ‘하노이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이 대화는 ‘기회를 놓쳤는가?(Missed Opportunities?)’로 명명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베트남 양측 최고 책임자 13명이 20여년 만에 얼굴을 맞대고 전쟁을 피할 길은 없었는지, 더 빨리 끝낼 수는 없었는지 열띤 토론을 벌인다. 전쟁 당사자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생생한 고백의 연속이자 뼈저린 역사의 교훈을 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20세기에 1억6000만명이 전장에서 숨졌고, 베트남 전쟁에서만 300만∼4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정부와 공산주의 반정부 세력 사이의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북베트남이 참전한 전쟁이다. 전쟁의 최종 결과는 미국의 무참한 패배였다.
이 대화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맥나마라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전쟁은 ‘맥나마라의 전쟁’이라고 불렸다. 그는 “20세기의 비참한 체험을 21세기 인류가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가가 나의 테마”라고 말문을 열었다.
대화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부 참석자가 상대방의 발언에 붉으락푸르락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격분해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공산화가 주변국의 공산화로 이어진다는 ‘도미노 이론’에 대한 공포로 남베트남 정부를 지지하면서 북베트남을 공격했다고 술회한다. 중국의 침략에 끊임없이 대항해온 베트남은 어이없는 발상이라고 맞받아친다. 무지와 오해에서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 협상 과정에 대해서도 이견을 표출한다. 당시 미국은 협상 중에도 북베트남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베트남 측은 “그건 마치 협상할 마음이 없으면 목을 졸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변한다. 이어 “폭탄이 국민들 머리 위로 비 오듯 쏟아지는 와중에 폭탄을 투하하는 장본인과 평화 협상을 한다고 국민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냐”고 했다. 맥나마라는 이에 대해 “그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허탈하게 말한다. 미군 측에 큰 피해를 초래한 쁠래이꾸 공격에 대해 베트남 측은 “남베트남에 있는 일개 게릴라 부대 사령관의 명령”이라고 해명한다. 대통령의 승인을 일일이 받은 뒤 공격을 실시했던 미국 측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대화 마지막 날, 미국 측은 베트남 대표단에게 묻는다. “지금 여러분은 우리의 평화 제안이 진지한 것이었다고 믿어 줄 수 있나요?” 베트남 측은 이렇게 답한다. “지금이라면 당신을 믿을 수 있지만 전쟁 당시엔 무리였습니다.”
맥나라마는 하노이 대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3가지로 요약한다. “지도자들이 현명했더라면 베트남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우선 적을 이해해야 한다. 다음은 최고 지도자끼리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얘기는 어렵게 북한과 대화의 문을 연 우리에게도 매우 유효해 보인다. 국가 간 대화의 힘을 역설하는 지난 세기의 기록이다. 전 일본 NHK 디렉터이자 국제 관계 전문가인 저자의 집요한 취재력과 균형 있는 시각도 돋보인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