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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연쇄살인범은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일까?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지영민 역을 연기한 배우 하정우. 이 작품은 살인마 유영철이 벌인 엽기적인 범죄 행각을 다룬 영화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였던 권일용은 유영철이 검거되자 구치소를 찾아가 유영철을 인터뷰했다. 그는 유영철과 대화를 나눈 뒤 이런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지금까지 봐왔던 범죄자가 아니구나. 우리 사회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을 낳기 시작했구나.’ 쇼박스 제공




영화 ‘살인의 추억’은 1980년대 경기도 화성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이었다. 실제 사건이 그렇듯 영화에서도 형사들은 범인 검거에 실패한다. 이 작품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2003년 한 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사건이 미제사건으로 남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범인과 시대 사이에 놓인 갭(gap·간격) 때문이었다. 범인은 시대를 앞서가는 범죄를 저질렀다.”

쉽게 말하자면 범인은 당시의 수사기법으로는 사건 해결이 난망해지는 지점을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경찰의 수사기법은 투박했다. 의심이 가는 용의자가 있으면 하나씩 불러다가 윽박지르거나 을러대곤 했다. 증거물은 허투루 다뤘으며 범인 검거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지금 다시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한 상상이지만 범인 검거에 성공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손금처럼 갈라진 도시의 골목길 곳곳엔 폐쇄회로(CC) TV가 설치돼 있고, 휴대전화 사용 이력을 추적하면 용의자의 발자취를 그려볼 수 있으니까. 아울러 2018년 대한민국엔 80년대엔 없었던, 흔히 범죄 심리 분석가로 통하는 프로파일러가 32명이나 활동하고 있다. 이들 프로파일러는 범인의 성격 심리 지능 직업 등을 추정해 “수사에 방향을 부여하면서” 범인 검거를 거들 것이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는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인 권일용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같은 인면수심의 살인마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검거됐는지 들려준다.

일단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권일용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89년 5월 순경 공채를 통해 경찰 생활을 시작해 지난해 4월 퇴직한 그는 2000년 1월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만들어진 범죄분석팀으로 발령이 나면서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찰 내부에서는 프로파일러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낡은 조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쁜 방식보다 낯선 방식”인 법이니까. 하지만 권일용은 우직하게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프로파일러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 활동하면서 지고의 가치로 삼은 건 범인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되짚어보는 거였다. 그의 컴퓨터 바탕화면엔 주야장천 참혹한 범죄 현장의 사진이 깔려 있었다. 아침이면 전날 발생한 주요 사건을 정리한 보고서를 일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으며, 30도를 웃도는 더위에도 양복 차림을 고집하곤 했다. 점퍼를 입은 형사를 대할 때와 달리 양복을 입은 사람을 마주할 때 용의자의 태도가 협조적으로 바뀐다고 판단해서다.

“프로파일링이 범인 검거나 체포에 적극적인 기능을 했던 첫 케이스”였다고 자평하는 사례는 정남규 사건이다. 정남규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10명 넘는 부녀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이었는데, 그가 경찰에 잡힌 건 2006년 4월이었다. 정남규는 서울 영등포구 한 다세대주택에 침입했다가 검거됐다. 그런데 이때만 하더라도 정남규는 ‘평범한’ 강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프로파일링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는 그의 강도 수법이 과거 발생한 많은 살인사건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드러냈다. 예컨대 정남규는 주택에 침입했을 때 둔기를 사용했는데, 돈을 훔치려는 강도는 둔기보다는 흉기를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권일용을 비롯한 경찰들은 “흩어진 척추뼈를 순서대로 발굴하는 고생물학자처럼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 더미를 파헤치며 힘겹게 연쇄성의 고리를” 이어나갔다. 유영철을 잡을 때도, 강호순을 검거할 때도 이런 일은 반복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희대의 살인마들을 경찰이 어떻게 잡을 수 있었는지는 당시 기사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프로파일러의 존재 가치를 명쾌하게 정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대표적이다. “프로파일러는 경찰 같은 심리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 같은 경찰이다” “프로파일러는 사냥개 없이 동물을 쫓는 사냥꾼과 같다” “감식요원은 발자국 자체를 감식하고 프로파일러는 발자국이 난 방향을 본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공저한 고나무는 과거 일간지 기자로 일한 적 있는 논픽션 작가다. 책에 담긴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육포처럼 건조한” 문장으로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그려낸다. 저널리스트의 글쓰기가 흔히 그렇듯 객쩍은 감상보다는 ‘팩트’를 땔감으로 삼아 쾌도난마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질문은 이거다. 연쇄살인범은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인 것일까. 책의 끄트머리에 실린 두 저자의 대담에서 권일용은 70년대 한국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연쇄살인범 김대두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나 영국도 197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봅니다.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된, 성과로 판정되는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잖아요. 김대두를 낳은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겠죠. 현재도 마찬가집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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