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6일(현지시간) 제73차 유엔총회를 맞아 국가정상급 회의를 개최했다.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장관급 인사들이 모여 회의한 적은 자주 있었지만 정상들이 대표로 직접 나선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 하지만 강대국들은 회의장에서 미·중 무역전쟁과 이란 핵 문제 등 글로벌 현안을 둘러싸고 이견만 노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월 안보리 순회의장국 대표 자격으로 직접 의사봉을 잡고 회의를 주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리 석상에 앉은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회의 주제는 ‘핵 비확산(Non-Proliferation)’으로, 핵심 안건은 북핵과 이란핵 문제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무역전쟁 맞수인 중국을 맹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은 나의 행정부가 올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하도록 선거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면서 “중국은 나와 우리 행정부가 이기길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최초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는 모든 무역 분야에서 중국을 이기고 있다”며 “우리는 중국이 다음 선거에 개입과 간섭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부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선거 개입 시도와 관련한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 행정부 고위관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대중(對中) 발언 해명을 위해 소집한 긴급 브리핑에서 “(중국이)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관세 부과에 맞선 중국의 보복관세가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을 겨냥하고 있어 선거 개입이라는 논리다.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했다. 왕 부장은 “중국은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항상 지켜왔다”며 “중국은 어떤 나라에도 내정간섭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을 향한 근거 없는 비난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왕 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도중 얼굴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등 불쾌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미·중 간 신경전은 회의장 밖에서도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관련 질문을 받고 “그는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유엔총회 연설까지만 해도 시 주석을 ‘내 친구’라고 지칭했었다.
안보리 회의장에선 트럼프 대통령 발언에 대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즉각 반박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 합의(JCPOA)가 “끔찍하고 일방적인 합의였다”고 주장하자 마크롱 대통령이 “이란을 다루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제재와 압박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한 것이다. 메이 총리도 “이란 핵 개발을 막을 최선의 수단은 JCPOA”라고 거들었다.
한편 시 주석은 헤이룽장성 산업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일방주의와 보호무역주의 때문에 중국은 자력갱생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됐다”며 “이는 나쁜 일이 아니다. 중국은 결국 자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이 미·중 무역전쟁 관련 발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7일 전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