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끝을 보았다. 20년 연기 경력의 배우 지성(본명 곽태근·41)에게서다. 두 번의 연기대상을 거머쥔 브라운관의 제왕이건만 본인은 “영화계에선 신인”이라며 한껏 몸을 낮췄다. “나는 부족하다”는 말도 하고 또 했다. 듣는 이는 의아한데, 얘기를 하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영화를 많이 하고 싶었는데 시기가 잘 안 맞았어요. 시나리오가 들어올 때는 드라마가 약속돼 있고, 드라마 끝나고 쉴 때는 또 안 들어오고…. 본의 아니게 주기가 길어졌는데, 이번 ‘명당’을 계기로 영화계에서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좋은 친구들’(2014) 이후 4년 만의 스크린 복귀다. 지성은 지난 19일 개봉한 ‘명당’에서 흥선대원군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몰락한 왕족으로 권력 싸움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상갓집 개’를 자처하며 살아가는 인물. 겉과 속이 다른 이의 폭넓은 감정 스펙트럼을 그는 유려하게 펼쳐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지성은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시나리오에 마음이 끌렸다. 더욱이 흥선대원군 역할이라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잘 표현해보자는 의욕이 샘솟았다”고 말했다.
흥선은 어떤 사람일까,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흥선에 대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죠. 지칠 정도로요.” 액션은 비교적 수월했다. “액션 연습은 평소에 트레이너와 함께 꾸준히 했거든요. 제가 액션을 뛰어나게 잘하는 편이 아니라, 늘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가장 신경을 쓴 건 발성이었다. “사극 발성은 호흡부터 달라서 너무 어려웠어요. 특히 후반부에 ‘네 이놈!’ 소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소리를 만들기 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집에서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연습을 했더니 딸 지유가 자꾸 따라 하더라고요(웃음). 결국 녹음실을 빌려서 목이 쉴 때까지 연습했죠.”
그의 이런 열정은 현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 조승우(38)는 그를 두고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듯 최선을 다한다. 그 성실함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원래 그리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냐는 물음에 지성은 “꼭 그렇진 않다”면서도 “연기에 있어 요령을 피우고 싶진 않다”고 답했다.
“물론, 20년 동안 연기를 해 오면서 나름의 노하우도 터득했죠. 힘 빼고 대충 해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진심을 담아 연기하고 싶어요. 편해지기 시작하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내리막길인 거죠. 끝없이 노력하고 발전하는 것이 롱런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안방극장에서 지성의 지위는 독보적이다. 연기대상을 안겨준 ‘킬미, 힐미’(MBC·2015) ‘피고인’(SBS·2017) 외에도 수많은 대표작들이 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아는 와이프’(tvN)에서는 평범한 가장을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때로 흥행에 실패한 적도 있으나, 어떤 경우에든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제가 굳게 믿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진심이요. 설령 시청률이 안 나오더라도 진심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되도록 그런 수치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해요. 그러다 보니 무뎌지더라고요. 잘 됐다고 크게 기쁘지도, 안 됐다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죠. 그저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어요.”
지성은 연예계에 소문난 ‘사랑꾼’이다. 7년 연애한 배우 이보영(39)과 2013년 결혼해 2015년 첫째 딸 지유를 얻었고, 지난달 둘째 임신 소식을 전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 끝은 ‘가족’으로 점철됐다. 그에게 가족이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최상위 가치인 듯했다.
“예전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 하는 꿈이 있었다면 지금은 바뀌었어요. 제 인생 최대 목표는 가족의 행복이에요. 그 안에서 제 일도 지속될 수 있겠죠. 좋은 아빠, 그리고 좋은 남편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며 살아야죠.”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